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편추방제 (문단 편집) == 폐지 == 처음에는 본래의 목적 그대로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가 실시되었지만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 도편추방제는 [[인민재판#s-2|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에게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가 주도하는 [[아테네 제국]] 정책을 반대하다가 추방당한 [[투키디데스]].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에 [[중우정치]] 시기가 되면서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기원전 416년 혹은 417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에 히페르볼루스가 추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편추방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편추방제는 이 때를 전후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히페르볼루스를 추방시켰을 때의 상황은 도편추방제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의 아테네 정계는 전쟁 방향을 놓고 니키아스의 신중파와 [[알키비아데스]]의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던 상황. 두 세력의 크기가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정책의 실현이 불가능했고, 히페르볼루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둘 중에 하나라도 쫓아내려고 도편추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연합(…)해서 역으로 히페르볼루스를 내쫓은 것이 사건의 전말. 확고한 적이 있을 때는 도편추방제가 효과만점이었지만, 내쫓아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야합으로 이런 식의 짓이 얼마던지 가능했던 것이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사후 [[중우정치]]에 질린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도편추방제를 없앤 것으로 표현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하여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했고 과두정의 특성상 개인 독재자가 등장하기는 힘들었다는 점도 도편추방제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의문. 사실, 아테네는 과두정을 받아들인지 단 1년 만에 과두정을 뒤엎어버리고 다시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도편추방제로 인한 중우정치를 막지 못하면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바뀌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테네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 도편투표가 명문출신이거나 웅변에 탁월한 사람, 또는 명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예로 페리클레스의 스승 다몬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해서 이 투표로 추방되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아리스티데스 편)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민이나 정적의 시기와 질투로 변질 될 우려가 높은 제도로 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