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자기 (문단 편집) === 일본 도자기의 발전 === 일본의 경우,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 중국의 유약 기술을 받아들여 도기를 전국 각지에서 만들었지만, 자기 제작의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납치해간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자기를 만들면서 일본에 처음으로 자기 기술이 알려졌고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 있거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조선통신사]] 등이 포로 송환협정을 타진할 때에도 도자기 장인만은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의 [[다이묘]]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조선 도공들을 가두고 숨기며 매수에다 여자를 붙여 자식까지 보게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당시로서는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고급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와 같던 도공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 에도 막부는 조선 도공들이 만든 자기를 일본산 자기와 구분해서 이도 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도공들의 [[귀화]]를 불허했고, 자기 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하거나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다. 그리고 [[한글이 적혀 있는 찻잔|이 찻잔]]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조선 도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조선인 도공들도 많았다 다. 1617년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종사관 [[이경직(1577)|이경직]]이 "부상록"이라는 기행문에 남긴 기록을 보면, 이경직이 조선인들을 만나 돌아가자고 제안했으나 "왜경(교토)에 도착한 이후에 와서 뵙는 자는 연달아 있었지만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매우 적었다. 되풀이해서 간곡하게 타일러도 의혹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 (8월 22일)" 고 적고 있다. 12~13세 때 끌려왔던 창원 출신의 김개금은 "부모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타이름을 받고도 "20여 년이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저버릴 수 없다" 면서 귀국을 거부했다. 위에 나오듯 처자식도 붙여 일본에 정착시켜 그런 듯 하다. 의혹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는 말처럼 조선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막상 기술자들을 귀국시켰으나 인조 3년(1625) 3월 회답사 정립 등은 갖은 고생 끝에 146명을 데려왔으나 "양식이 떨어져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 고 호소했다. 한국 도자기 문단에 나오듯 본국 장인도 양난 이후 어려워진 상황이긴 했다. 별개로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음을 근거로 도공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억측도 있지만, 이미 조선 시대에도 도자기에 이름을 쓰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도자기에 이름을 쓰게 한 것은 장인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 아니라 [[불량품]]이 나오면 책임을 질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책임 전가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 도공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선 일반 민가에서 쓰이는 수준의 막사발이 일본에선 고위층들끼리 주고받는 선물로 쓰였고 현재도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12061252001|#]] 는 말이 있지만, 이는 오래된 낭설이다. 이 낭설은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에서 기인한다. 그는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라고 평했고, 이것이 일종의 '정설'이 되어 널리 퍼졌지만, 현재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반박당해 현재 이도 다완을 막사발로 간주하는 일은 없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뒤졌던 일본 [[전국시대(일본)]]에는 차를 따르는 데 쓰던 다기가, 특히 중국 다기가 매우 비쌌는데, 그중에는 성 하나 값에 맞먹는 것도 있었다. 일본은 어떻게든 자국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하려고 애썼지만,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 준할 수준의 자기를 제작할 수가 없어서 임란 이전까지도 자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평민들은 값비싼 자기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 지배층들 사이에서 다도가 유행하자, 차를 마시는 끽다(喫茶) 문화가 고급 문화로 자리매김했고, 당연히 여기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 역시 고급화되어 값어치가 뛰었다. 점차 다례에 쓰이는 자기들이 화려해지고 사람들이 점차 그런 것들만 찾기 시작하자, 16세기에 [[센 리큐]]가 이런 풍조헤 반발하며 '와비 사비'라는 미적 개념을 수립, 이도 다완 같은 사기를 검소함의 극치로 재평가하기 시작하자, 화려한 다완들이 다회에서 사라지고 이도 다완과 같은 양식의 다기들이 각광받았다.[* 하류층 출신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나 상류층들의 문화에 대한 식견이 적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히데요시는 자신이 천하인이 되고 나서 주최한 다회마다 화려한 다완들을 가져오곤 했는데, 이미 소박한 다완들이 대세를 이룬지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유행에 한참 뒤쳐지고 다도에 무지하다는 인상을 주기 딱 좋았다.] 지금도 도요지 터에서 자기를 쌓아 굽다가 무너진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그릇 여러 개를 쌓아 구움은 중국과 한국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완(그릇)은 하나만 올려 놓고 만들면 너무 낭비인지라 쌓아서 굽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보물로 전시한 고려-조선시대 다완에도 쌓아 굽다 보니 그릇에 남은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쌓는 방식이 시기마다 달라서 그 흔적으로 [[고고학]]적 세부 편년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청자완은 내화토라는 것을 굽 아래에 발라서 계속 쌓는데, 내화토가 아래의 그릇 안에 묻어서 남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박물관에서 청자완을 관찰하면 이상하게 뭔가 흰 것이 묻은 흔적이 보일 텐데, 그것이 내화토 비짐이다. 조선의 자기는 그릇 아래 모래 알갱이 같은 게 보일 텐데, 모래비짐이라고 모래를 발라서 쌓았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이 없는 완들은 주로 갑발이라는 흙으로 만든 상자를 이용했는데,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상자 모양 갑발보다 더 많이 쌓을 수 있는 M자형 갑발을 이용해 대량생산을 했다. 지금도 장인들은 막사발 형태로 다완을 만든다. 일본에서 조선 스타일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부산]] [[왜관]]에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되었는데 훗날 부산요(釜山窯)라고 이름지었다. 일종의 [[OEM]] 방식.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조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기술자에게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에서 좋아할 만한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부산박물관]]에 당시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냈던 주문서가 전시돼있는데 디자인, 치수, 문양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백여 년 운영되다 조선이 재료 무상 공급을 거부하고 일본 현지의 자기 기술력이 차차 조선을 능가하면서 1717년에 폐쇄됐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5a4a2452280178a468e3018dbb939327.jpg]] 서양에 수출되던 일본자기의 대표적인 양식 [[파일:external/dimg.donga.com/62320784.1.jpg]] 청나라 시대 중국 도자기, 17세기 무렵 중국과 일본은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경쟁을 벌였다. 일본의 자기 제조기술은 상술한 대로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의 도공들 덕분에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삼평]]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여기에 [[명나라]]가 멸망하자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의 도공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많은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본 자기를 서양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명 · 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의 도자기 생산량이 급감하자, 새로운 자기 생산지를 찾았다.[* 그나마 일시적인 것으로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중국산 도자기를 여러개 구매해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저택에 구비해놓은 장면이 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 일본 자기의 품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다. 시간이 흐른 뒤부터는 편의를 위해 손잡이가 달린 잔도 제작했다.[* [[신라]], [[가야]]에서 만든 도질 토기 중에서 파배라는 것은 현대의 컵과 똑같이 생겼다. 이러한 도질 토기 제작 기법은 왜국에도 전해져 스에키라는 토기 형식을 탄생시키는데, 사실 둘 다 형태는 거의 같다.] [[17세기]] 이후 일본이 서양에 수출한 도자기는 뜨거운 차와 찻잔에 익숙치 않았던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춰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일본의 도자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유럽]]의 기술까지 도입하여, 매우 얇고 가벼운 도자기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백자를 대체하는 소위 왜자기로 한국 시장을 잠식해서 한국 도공들의 밥줄을 끊어버렸다. 여담이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로 막부를 몰락시킨 유신지사들의 자금줄에는 도자기도 있었다. 즉, 임진왜란을 일으키다 망한 자들의 후예가 임진왜란 때 잡아온 자들을 통해 얻은 돈으로 임진왜란 덕에 어부지리를 얻은 자들의 후손들을 몰락시키고,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는 씁쓸한 이야기.]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 일본과 중국이 경쟁하던 시절 도자기가 궁금하다면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3869594&cpage=1&mbsW=&select=&opt=&keyword=|여기로.]] [[오키나와]]의 경우 츠보야 야치문(壺屋やちむん)이라는 도자기가 유명하다. 17세기에 [[류큐 왕국]]이 [[사츠마 번]]에 요청하여 임진왜란때 포로로 끌려온 도공 장헌공(張獻功)을 초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을 통해 독자적으로 안료 및 그 사용법을 들여오고 발달시킴으로서 자신만의 도자문화를 발달시켰다. 한편 [[우라소에 성]]에서는 [[삼별초]]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한 13세기 고려기와가 발견되었고, 다른 유적에서 고려자기도 여럿 출토되기 때문에, 그 전부터 [[고려]]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누]]의 경우 독자적인 토기 문화가 발달하기는 했으나 도자기 문화로 발전하지는 못한 채 야마토 민족의 도자기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래도 [[도호쿠]]와 [[홋카이도]]에서 아이누 문화가 훌륭한 관광자원인 만큼 아이누식 토기를 만드는 장인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