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자기 (문단 편집) === 번외: 튀르키예의 도자기 ===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도자기 역사에서의 튀르키예의 입지이다. 동서 문명의 교류의 중심지에 있던 중동권은 중국의 자기를 국산화 하기 위해서 여러 왕조가 심혈을 기울였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때문에 그들의 기술은 늦은 시점까지 도기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중동지방의 토질은 고령토가 나기 어려운 종류였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자신들의 도자기의 품질을 인정받고 수출까지 한 나라가 바로 [[튀르키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Ming_plate_15th_century_Jingdezhen_kilns_Jiangx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tone_paste_dish_Iznik_Turkey_1550_1570.jpg]] 1470년 무렵 중국 [[명나라]]의 [[경덕진]]에서 생산된 당초문 청화백자(위쪽)와 1550~1570년 무렵 이즈닉에서 만든 도자기(아래쪽)의 비교. [[13세기]]무렵부터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도자기를 제작했는데, 특히 [[이즈니크]](İznik)에서 생산한 이즈닉 치니가 유명하다. 이즈닉 치니는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하던 당대의 요구에 맞춰 중국산 도자기를 모방하면서 시작했다. [[코발트]] 염료를 사용하는 중국식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코발트 염료와 더불어 다양한 색깔의 광물성 물감을 직접 도자기 위에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붓으로 검게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굽는 점이 다르다.[*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자기와 달리 굽는 온도가 상당히 낮다. 초벌구이는 900~1100도에서 하고, 색을 입히고 유약을 입힌 다음 850도에서 재벌구이를 하는데, 동아시아의 자기는 최소한 1300도 이상에서 구워져야 한다. 후술하지만 튀르키예의 치니는 유리질의 유약으로 코팅한 도기라고 보면 된다.] 색깔이 매우 선명하며 겉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서 굽기 때문에 광택은 진짜 자기와 비슷하지만, 고령토와 산화 [[규소|실리콘]]과 유리질을 혼합한 점토를 사용하여 자기 느낌의 도기를 만든 것이라[* 치니에 사용되는 흙의 비율은 성형 시 흙을 무르게 하고 건조되면 백색으로 변하는 점토 20-30%, 완성품의 흰색을 내게 하는 고령토 25-30%, 3.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하는 석영 등의 산화 실리콘질 돌가루 25-35%, 그리고 장석 15-20%라고 한다.] 동시대 중국산 도자기에 비해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주로 [[모스크]]벽을 장식하는 타일로 만들었고 그 외에 중산계급과 귀족들을 위한 각종 그릇과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왕족들은 여전히 진품 중국산 도자기를 애용했다고. 16세기가 되어 이즈닉에서 질 좋은 흙이 고갈되자 중심지는 내륙의 퀴타히아(Kütahya)로 옮겨졌고 심지어 한때 이즈닉 치니는 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1985년 에쉬레프 에르오울루(Eşref EROĞLU)와 세이한 에르오울루(Seyhan EROĞLU) 부부가 복원한 덕에 오늘날에는 관광지에서 값비싼 기념품으로 팔린다.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도 서구화의 영향으로 도자기 취향이 유럽풍으로 바뀌었고, 제작법도 프랑스 세브르 자기의 영향을 받았다. 참고로 이을드즈 자기(Yıldız porseleni)는 [[압뒬하미트 2세]] 황제가 [[돌마바흐체 궁전]]을 비롯한 유럽풍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 취미 삼아 시작했다가(...) 귀빈 선물 등 목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다보니 품질이 수준급으로 좋아졌다. 1892년경 황립 이을드즈 도자기 공장(Yıldız Çini Fabrika-i Hümâyûn)이라는 이름으로 이을드즈 궁전 안에다 아예 공장을 차렸고,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나서 국영화되었으나 주로 전신선을 연결하는 도자기 부품같은걸 만들었고, 1957년에 국영은행인 쉬메르반크(Sümerbank)로 운영주체가 넘어간 뒤로는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양산형 도자기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튀르키예 내 유일한 도자기 공장이었는데, 현재 튀르키예 도자기의 대표브랜드라 할 수 있는 퀴타햐 자기(Kütahya porselen)과 귀랄 도자기(Güral porselen) 두 회사 모두 창립자가 이을드즈 도자기 공장 출신일만큼 영향력이 컸다. 이후 1994년에 다시 운영주체가 튀르키예 국회로 넘어갔는데, 이때 되어서야 압뒬하미트 2세 시절의 도자기들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모든 제품들이 생산은 공장식으로 하되, 핸드페인팅으로 장식되기 때문에 120명이나 되는 화가들이 이 공방에서 일하고있다. [[파일:external/www.topkapisarayi.gov.tr/34-417_0.jpg]] 1880년대에 제조된 [[오스만 제국]] 이을드즈 자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