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원결의 (문단 편집) == 결론 == 중요한 것은 도원결의 이전이 아니라 도원결의 이후 유관장 삼형제의 행보다. 평생토록 겪었던 험난한 시련은 물론이요, [[조조]]와 [[손권]]을 비롯한 여러 적들의 수많은 공격과 유혹에 삼형제는 굴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서로 저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의기투합하여 난세를 헤쳐나간 덕에 도원결의는 비록 허구의 이야기일지라도 이들의 영원한 우정을 일컫는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군신과 형제와 친구와 부부 사이에 배반과 통수가 밥먹듯이 일어났던 후한 말의 난세였기에 이들의 의(義)는 그런 진흙탕 속에서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난세이던 당시엔 [[정원(삼국지)|상관]]과 [[동탁|양아버지]]를 죽인 [[여포|배신의 상징]]도 있었고, 의심이 든다고 자신을 친절히 맞이해주던 [[여백사|옛 친구]]와 그 일가족을 죽인 [[조조|군주]]도 있었으며[* 정사에도 위서 무제기에 배송지 주로 등장한다. 다만 연의에선 아버지 친구로 나온다.], [[형제]]끼리 못 싸워서 안달이던 [[원술|사세삼공의]] [[원소(삼국지)|명문가]]도 있었고, 망해가는 황실을 외면한 채 황제놀이를 하던 [[유표|황]][[유언(삼국지)|족]]들도 있었다. 누구보다 사람들 눈을 신경써야 할 군웅들조차 이랬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이런 험난한 시대에 유관장 삼형제는 난세에 몸을 던진 작은 세력으로 수많은 고비를 겪고 아예 적에게 풍비박산나 부득이하게 서로 떨어지게 된 일도 여러번 있었고, 더 크고 강한 세력들의 유혹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관우만 하더라도 조조에게 항복 후, 엄청난 호의를 받았지만 모두 저버린 채 결국 빈털터리에 객장 신세인 유비에게 돌아갔고, 최후에는 손권에게 사로잡혀 죽는 순간에도 그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날 한시 함께 살았던 생전은 물론, 비록 [[도원종언|한날 한시 같이 죽지는 못할 때]]까지, 유비, 관우, 장비는 서로 단 한 번도 배반하지 않았다. 정사에서든 연의에서든.''' 애초에 관우의 일화를 필두로 유비 세력 자체가 의리남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유비가 여포의 배반으로 서주에서 탈출해 조조의 객장으로 머물 당시 조조는 관우는 물론 장비, 미축, 손건, 간옹 등 유비의 핵심 인재들에게 관직을 주며 은근슬쩍 유비의 세력과 인재를 와해시켜 자기 휘하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특히 장비에게는 중랑장 벼슬까지 내렸고, 장비의 아내 하후씨는 위략에서는 납치당했다고 언급하나 포섭하고자 정략결혼으로 장비를 하후씨 집안 사위로 끌어들이려다 실패한 것을 납치로 언플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오나라의 주유는 적벽에서 관우와 장비를 직접 다루어본 사람인데, 관우와 장비는 천하의 용장이지만 오직 유비에게만 충성하니, 일단 유비를 잡아놓고 온갖 부귀영화를 줘서 무능한 인간으로 만든 뒤에 내가 저 둘을 다루면 [[천하통일]]도 꿈은 아니라며 손권에게 구체적인 계획까지 제안했다. 손권이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완충지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유비를 놓아주는 바람에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때도 주유는 유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무력화하고 관우와 장비를 수하에 두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불구대천|유비를 죽인다면]] 저 둘을 따르게 할 가능성 자체가 [[복수|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유관장 삼형제를 제외하더라도 삼국지에서 [[손책]]과 [[주유(삼국지)|주유]], [[한수(삼국지)|한수]]와 [[마등]] 같은 경우처럼 의형제를 맺은 다른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수와 마등 같은 경우는 연의 기준으로 마등이 죽을 때까지 한수와 친했지만 아들인 [[마초]] 대에서는 조조의 농간으로 한수와 갈라지면서 빛이 바랬고, 정사에선 아예 한수와 마등이 서로 대립했다 뭉쳤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의형제라기 보단 서로를 이용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손책과 주유의 경우는 사이가 좋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시험받을 정도로 큰 위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둘 다 너무 일찍 죽었다. 결국 도원결의는 그 자체보다도 맹세를 한 유관장 삼형제가 이후 온갖 유혹과 위기를 맞닥뜨려도 흔들리거나 굴하지 않고, 숱한 역경들을 겪었어도 끝끝내 서로 배신하지 않으며 그 결의를 끝까지 지켜냈기에 특히 돋보이는 것이다. 삼형제는 서로 20대에 만나 [[형주 공방전|관우가 패사할 때까지]] 수십 년을 함께 했다.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고 혼란했던 천몇백 년 전 시대에서 수십 년을 굳건한 결속력으로 이어진다는 건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고대까지 갈 것도 없이 현대인들 역시 수십 년은 고사하고 단 몇 년이나 몇 개월이라도 굳건한 신뢰가 이어지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이런 점이 당대인들은 물론 후세까지도 [[사대부]]나 민중, 삼국지연의를 형성한 이야기꾼들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과 감동을 줬던 것이다. 중국 뿐만 아니라 삼국지가 널리 퍼진 [[한자 문화권|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도원결의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의리의 상징으로 굳어진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도원결의에서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으로 나이 문제가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일단 유관장 3인의 생년월일은 명시되지 않았는데, 다른 자료들까지 참고하면 유비는 161년생이고 관우는 160년생 혹은 162년생, 장비는 165년생으로 장비가 확실히 막내인 것은 맞다. 문제는 관우인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민간설화의 162년 관우 출생설을 채택하여 나이순으로도 유비>관우>장비가 되도록 설정하고 있다. 다만 장비가 167년생이 되기도 한다.그러나 관우가 160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이를 채택한 것이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다. 여기에서는 실제 나이로 따지면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많지만 관우가 스스로 맏이가 되는 것을 사양하고, 인덕의 그릇이 큰 유비에게 큰형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나온다.항우와 유방도 반진전쟁 당시 유방이 나이가 많았지만 세력이 큰 항우가 형을 맡은 바가 있다.[* 항우는 사망 당시 나이가 고작 30세였다. 반면 유방은 항우와 만났을 당시 이미 40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