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원결의 (문단 편집) == 분석 == 치밀한 복선, 소설의 장치, 적합한 개연성 등을 따지는 현대 소설의 관점에서 보면 도원결의는 굉장히 '''[[뜬금포|구시대 감성에 인기를 끄는 굉장히 갑작스럽고 순진무구한 전개]]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오로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비, 관우, 장비가 그 전에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선 그나마 잘 알려져 있었던 게 유비. 연의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며 돗자리 장수를 했다는 것, 공손찬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는 것, 유가촌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 등이 도원결의 이전에 있었다고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에 비해 관우나 장비는 정말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 후대에 창작되었거나 덧붙여진 내용들이다. 복잡해져 따질 것이 많아진 현대 시대 감성 기준으로는 이 장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할 이유를 따지자면 끝도 없고, 트집을 걸려고 하면 역시나 끝이 없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도원결의는 고전소설로서 삼국지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유비, 관우, 장비의 만남이 합리성이나 개연성을 떠나 직선적이고 간결하기 덕분에 도원결의에서 보여주는 의리와 우정이 더욱 빛난다. '아무 관련 없던 세 남자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의 아래 우정으로 똘똘 뭉쳤다.' 라는 대목이 주는 ~~[[남자의 로망]]과~~[* [[삼국지연의]]의 해외 명칭이 The '''Romance''' of Three Kingdoms임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물론 여기서 Romance는 [[로맨스]](연애물)가 아니라 [[로망]]이다.] 간단하고도 강렬한 충격, 비루한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뜻을 품고 살던 유비가 그의 뜻을 함께하는 두 아우를 만나는 '우연성' 때문에 삼형제의 '운명적인 관계' 역시 더욱 돋보인다. 말하자면, '어차피 맺어질 사람들은 맺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지식인들보다는 주로 평범한 농민 상대의 길거리 강담극으로 시작한 삼국지연의의 전체 흐름을 보면 유비, 관우, 장비의 과거를 길게 서술하면 과거 기준으로는 관객들이 지루해할 우려가 있다. 훗날 난세를 헤쳐나가 천하를 다투는 스토리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기에 [[나관중]]이 [[감독판|'''쓸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고 간주]]했을 수도 있다.[* 삼국지연의는 유관장 삼형제가 주인공이라곤 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시점이 바뀌면서 여러 인물들을 묘사하는 군상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삼국지에서 중요한 것은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의한 삼형제가 대륙을 누비며 그 우정과 결의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장면이지, 이들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는 비교적 그 중요도가 떨어진다. 당초 난세에는 그 인물의 과거가 어땠느냐보다는 지금 나와 함께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는 기존부터 이어져 오던 사회상이 그 권위의 추락과 득세의 열망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온갖 사회 계층에서 별의별 인물들이 다 판치고 다니던 격변의 시대였다. 삼국의 세 군주들만 봐도 유비는 말이 좋아 황실 후손이지 정사에 대놓고 짚신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는 말이 적혀있는 평민이나 다름없었고, 조조는 명문가 출신이긴 하지만 은근히 괄시당하는 환관의 손자(조조의 아버지가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였으며, 손권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속된 말로 자기 나와바리에선 한따가리 해도 중앙에는 진출해보지도 못한, 3명 전부 그 시대에는 하자가 하나씩 있는 출신이었다. 이 3명 말고도 후한말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대부분도 그때 기준으로 나사가 더 많이 빠진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민족 킬러로 불리는 공손찬은 첩의 자식인 '''서자'''인데다가 조조랑 맞장을 깠던 원소는 '''서자인 그 공손찬한테 얼자(노비자식)라고 면전에서 까였던 사람이다.'''] 이는 고전소설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는 고전소설인 만큼 현대소설과는 문체와 서술법이 다르다. 당시에는 만담가에 가까운 강사[* 우리나라로 치면 [[판소리]]꾼. 특히 [[양반]]들의 향유물로 바뀌기 이전에 시장바닥에서 돈을 받으며 공연했던 초창기 쪽이다.]들이 관중을 모아놓고 판을 벌여서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려면 그리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과거사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강렬하고 멋진 묘사, 그리고 그들의 주요 행적 위주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고전소설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고, 대의를 위해 셋이 함께 떨치고 일어났다' 라며 도입부를 정리하고 바로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가는 것이 몰입감 넘치고 내용도 깔끔한 것이다. 이런 전개가 현대인에게는 먹히지 않을 뿐.[* 현대 매체에서는 사건의 개연성을 중시하므로 이런 전개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로맨스 소설을 쓰더라도 주인공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서로를 사랑하게 됐는지 그 과정을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그려 내야지, 갑자기 눈이 마주치고 운명의 이끌림을 느껴 평생 사랑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런 전개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토르: 천둥의 신]]에서 고전적인 느낌을 줘 보겠다고 [[토르(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토르]]와 [[제인 포스터(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제인 포스터]]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묘사해 서구권 평론가들이 모인 로튼토마토에서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 어찌보자면 정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도원결의 대목을 읽는 현대인들의 반응이 '뭐 이렇게 뜬금없어'인 것도 시대가 지나면서 독자들의 정서와 취향이 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대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는 도원결의 장면 이전에 짧게라도 삼형제가 엮이는 과정을 묘사한다. 일부 삼국지 판본에서도 이 셋이 어떤 일로 우연히 엮인 후 다시 재회하여 그때부터 의기투합했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며, 평역자나 편집자의 취향에 따라서 그 내막이 상세하게 달라진다. 독자들 또한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판본이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으로는 현대소설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도원결의의 구성을 꼭 부적절하다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작중의 모든 사건에 대해 독자에게 그럴싸하게 납득시키는 것이 작가의 책임이지만, 소설의 분량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작중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일일이 기승전결을 부여할 수가 없다. 삼국지연의는 유관장 세 사람이 만나 의형제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관장 삼형제가 한말의 난세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삼형제가 되는 것은 이야기의 발단이며, 분량이 정해진 소설이다보니 "셋이 출발하기 전에 원래부터 이랬었다" 하는 식으로 간단한 배경이야기처럼 서술하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후의 극 전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부분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도 굳이 시시콜콜하게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이들이 왜 같이 만나 형제가 되었냐가 아니라, 서로 형제가 된 그들이 어떻게 난세를 헤치며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맹세를 지켰는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까지 소설의 작법은 등장하는 인물, 사건 및 소재의 배경에 대하여 제한된 분량을 사용하면서도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최대한 제공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는데, 이는 독자의 요구가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에 쓰여진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삼형제의 과거 이야기를 추가하는데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게 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도원결의 장면의 개연성을 위해서는 그 앞부분에 서술이 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셋이 의형제가 되는 과정에 대해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려면 한나라 말기의 사회상에 대한 묘사가 필수적이며, [[장각|일개 민간 의료사 겸 종교 교주]]가 휘하 무리들을 이끌고 [[황건적의 난|반란을 일으켜 나라의 존망을 위협]]한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왜 하필 노란색을 상징으로 삼았는지에 대해 [[오행|오행도참설]]을 가져와서 해설해야 하는데, 그러면 오행 이론은 물론 도교 사상의 발달 과정 및 변천사까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에 대해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근대 유럽, 특히 프랑스 소설가들이라면 이렇게 쓰고도 남지 않았겠느냐고 농담하는 이들도 있는데, 사실 그들이 그렇게 쓸 수 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단어당 지불받는 원고료'''였다. 길게 쓸수록 많은 원고료를 받을 수 있으니 온갖 장광'''썰'''을 다 풀어서 길게 쓸 동력이 생겼던 것. 물론 그렇다고 아무 소리나 하면서 무조건 분량만 늘이면 독자들이 화를 내서 그의 소설을 보지 않게 될테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그 시대의 소설 독자들이 [[나무위키]]스러운 지식자랑을 읽는 것 또한 즐거워하던 시대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문열]]처럼 관련 지식을 잔뜩 늘어놓는 스타일의 소설가가 큰 인기를 끌었던 시기가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냥 핵심 줄거리를 스피디하게 진행하는 스타일이 유행하는 시대가 있으면 관련 정보나 지식, 주변부 에피소드 등을 잔뜩 엮어 읽을거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스타일이 유행하는 시대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한 한나라 조정이 어떻게 썩어갔으며, 당대 제후들이 어떻게 해서 군벌로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다보면, 한나라의 정치와 군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설명을 써놓은 후 삼형제가 걸어온 과거를 슬쩍 양념으로 곁들이면 충분한 개연성이 확보될 것이며, 도원결의 장면만 가지고 하나의 완결된 시나리오를 만들 수가 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이것은 이미 소설이 아니라 역사 교양서적의 수준에 달해 있다. 물론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저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냐, 도원결의의 개연성이 부족하니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반론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는 옳은 말이다. 예를 들어 위의 예시에서 '오행도참설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부분은 거의 정신줄 놓은 드립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장 역시 어떤 작품이든 그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완벽한 인과관계와 기승전결을 제시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어떠한 지점에서 그런 설명을 중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예시로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요소의 인과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하면 그 설명에서 또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게 되기에 그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완벽한 설명을 위해서는 사실상 무한한 분량이 필요하다. 결국 고전소설이든 현대소설이든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라고 짐작되는 지점에서 더 이샹의 설명은 생략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고전 독자에 비해 현대 독자들의 경우 그 '지점'의 위치가 좀 더 멀어지고 그 사이의 영역에 대해서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최근의 삼국지연의 매체에서 도원결의 장면 전에 유관장 3인이 미리 만나 얽힌 이야기 이외에도 배경인 한나라 말기의 혼란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함께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아진 것 역시 결국은 이 때문. 또한 이는 독자의 관점 변화로도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이다. 중국 고전 전통에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협객>은 아주 전형적인 영웅상 중 하나였고, 이런 협객들이 사소한 계기로 뜻이 맞아 서로 생사를 함께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클리셰였다. 그러니 그저 술집에서 뜻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 대뜸 의형제를 맺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하는 것이 (최소한 창작물 속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며, 그들의 영웅호걸다움을 보여주는 면모로 여겨질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변화한 현대인 독자들의 눈에 그것은 이상한 일로 비치기에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줄 복선을 만들어줄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문학적인 상징으로 도원결의를 해석하자면, 도원향, 즉 복숭아꽃이 만발한 세계는 고대 중국인들의 신화였던 서왕모의 복숭아 과수원부터 유래되어서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통해 중국인들이 꿈꾸는 완벽한 이상향의 세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이후로 도원향은 성당 시절의 왕유와 이백의 시를 통해 이상향의 상징으로 다시금 각인되었고, 북송의 소동파는 도연명을 중국 제일의 시인으로 숭상하면서 도원향은 중국을 넘어서 한국과 일본같은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도 이상향의 대명사로 불후의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에게도 이상향으로서의 도원이라는 문학적 상징이 매우 익숙하였을 것이다. 나관중이 쓴 도원결의 장면은 삼국지연의 초반부의 절정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의 세 주인공,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도원향이라는 이상향에서 신성하고 순수한 약속를 맺었다. 도원에서의 결의는 이상의 상징이고, 질서의 상징이고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낙원으로서의 도원향은 유비 삼형제가 결의후에 뛰어들게 된 파천황의 세계인 한말 위진남북조의 대혼란이 벌어지는 현실세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후한 말부터 불어닥친 소빙하기로의 기후변화는 온갖 자연재해를 불러왔고, 그 결과 황건적의 난이라는 거대한 폭발로 현세지옥의 절정을 이루었다. 후한 육천만명의 인구가 백년도 못가서 2천3백만명으로 무려 60%의 인구가 사라지는 종말론의 세계였다[* 물론 정말 3천7백만명이 죽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혼란과 무정부상태로 인해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비율이 그만큼 격감했다는 의미이다.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혼란기를 지날때마다 인구가 절반 이하로 격감하는 것은 십중팔구 정말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등록된 인구가 그만큼 격감했다(=인구집단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도원향의 평화롭고 풍족한 이상향과는 달리 후한말과 위진남북조 시대의 현실은 식인행위까지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본능이 횡행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아포칼립스적인 세계를 초래한 황건적의 난 역시 공교롭게도 유비 삼형제와 대비되는 또다른 삼형제인 장각, 장보, 장량에 의해서 일어났다. 나관중은 도원향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간에 삼국지연의 초반부 절정장면에 배치함으로써 위진남북조 시대에 못지않게 참혹한 원말명초의 혼란기에서 중국 민중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인 도원향에 대한 희망을 삼국지연의의 주인공들에게 투영했었을 것이다. 도원결의는 서왕모의 복숭아 과수원을 연상시키는 천상의 이상적인 공간에 사는 삼국지 연의의 세 주인공들을 마치 환웅 신화같은 천손 신화의 영웅들처럼 참혹한 현세지옥의 세계로 하강시킴으로써 천상의 이상적인 질서와 유토피아를 지상에 재현하려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또한, 조셉 캠벨의 신화비평에 기초해서 분석하자면 결의가 이루어지는 도원은 '모험에의 소명'이 부여되는 평화로운 일상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도원결의를 이후의 유비 삼형제가 걸어갈 혼란스러운 중국 대륙과 도식적으로 비교하자면, 아래와 같다. 도원 ↔ 세속 천상 ↔ 지상 이상 ↔ 현실 질서 ↔ 혼란 평화 ↔ 전쟁 신의 ↔ 배신 유비 삼형제 ↔ 장각 삼형제 위와 같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나관중이 신화적인 공간[* 삼국지연의의 중반부에 도원처럼 평화롭고 신화적인 공간이 또 나온다. 바로 삼국지연의의 네 번째 주인공인 [[제갈량]]이 은거했던 고향 융중(隆中)이다. 이후에도 여러 도사들(서촉의 멸망을 예고한 [[자허상인]], [[이릉대전]]의 패배를 예고한 [[이의기]] 등)을 등장시켜서 [[모사재인 성사재천|사람이 노력해도 하늘의 뜻을 이길 순 없음]]을 계속 시사한다.]인 도원을 교묘하게 배치한 이러한 대비효과는 유비 삼형제에게 신화적인 아우라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영웅적인 행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또한 유비 삼형제의 [[도원종언|비극적인 결말]]에 상심할 독자들에게 주인공 삼형제가 죽더라도 다시 돌아갈 이상향으로서의 발할라 혹은 발리노르같은 공간인 도원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위안과 희망을 주는 효과 또한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