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시 (문단 편집) === 과거의 도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도시의 형성.png|width=100%]]}}}|| 지역과 시대, 문화에 따라 도시의 형태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중앙에 통치자의 성이나 궁정, 시청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바로 옆은 관리들이, 그 옆은 일반 시민들(주로 상공인)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이 쌓였다. 도시의 핵심은 '''[[교통]]'''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이를 잘 설명한다. 즉 어느 길을 가든지 로마로 가게 만들 정도로 길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었다는 말. 당시의 교통 환경상 속도나 가격 면에서 수운이 최선이었지만,[* 가령 이베리아 반도의 [[타라코]]에서 [[로마]]로 배를 통해 낮에만 연안을 항해하는 것도 육로로 가는 것보다 두 배 이상 빠르고, 비용은 다섯 배나 저렴하다. 오죽하면 바로 옆동네 밀을 두고서 한참 떨어진 외국에서 배로 실어다가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이라는 어느 [[중세]] [[이탈리아인]]의 푸념도 있었을 정도.] 수운이 가지는 위험성 탓에 거기에만 의존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어쨌든 인접 지역과의 교류를 위해서라도 육로가 필요했다. 따라서 역참을 통한 군사 통신, 대규모 운송을 위해 말과 수레가 잘 다닐 수 있도록 돌길을 깎아서 도로를 만들었다. 이는 병력이 신속히 이동하는 데 쓰였다. 동양과 서양은 [[성(건축)|성]] 개념이 상이했으나, 도시에 한해서는 유사한 편이다.[* 중세 [[영주(중세)|영주]]들의 성(castle)은 거점으로서 인근 영역을 다스리는 군사·행정 중심지였기에 평소에는 영주 본인이나 영주가 임명하는 관리인, 해당 성에 딸린 [[기사(역사)|기사]]나 [[서전트|종사]], 장인 등 각종 가신과 고용인만 거주하고, 유사시 주변의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각종 촌락이나 장원 등의 거주자들이 성내로 피신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반면 도시라면 동양과 마찬가지로 내부 성채(citadel)와 성벽(wall)으로 도시 전체를 보호하였고, 시가지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도 충분히 성장하면 새로이 성벽을 쌓아 보호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좀 차이가 있으나 대략적으로 도식화하면, 통치자의 거처나 공공 업무를 위한 장소로서의 성이나 [[팔츠|궁정]] 인근 지역을 둘러싸는 '내성', 중상류층을 수용하는 '외성'이 있었고, 하류층은 종종 외성 밖으로 시가지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관리나 방어 상의 이유로 성벽을 증·개축하더라도 가급적 성내에 수용하려는 편이었다. [[고대]]에는 [[지중해]] 세계에서 도시 단위의 정치체나 행정 구조가 발전하였다. 최초에는 여러 부족이 각각 평시 주거지를 보유하고 유사시 공유하는 피난처를 두었으나, 차츰 부족연합체가 단일한 도시공동체로서 [[도시국가]]로 변모하면서 양자가 융합되거나 평시 주거지의 규모가 커지고 방어 시설이 강화되면서 옛 피난처가 버려지게 되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버려진 피난처가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잊혀진 결과, 나중에 그곳을 다시 발견한 후손들이 그 기원을 알지 못해서 이를 두고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도시로 편입된 옛 피난처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나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카피톨리누스 언덕]]과 같은 [[종교]]적 중심지가 되고는 하였다. 고대 도시는 정치·상업·문화·행정 등 제분야의 중심지였고, 인근 촌락은 도시에 종속되었다. 귀족 등 상류층은 주변 농촌에 [[빌라]](villa)나 [[라티푼디움]](latipundium)과 같은 자기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관리인을 주재시켜 경영하였으며, 그 자신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집정관]]이나 [[원로원]] 등 요직에 앉아 공공 업무를 돌보았고, 종종 농장을 방문하여 가산을 관리하였다. 특히 [[고대 로마]]는 제정 성립 후 식민시(colonia)-자치시(Municipium)를 거쳐 중심 도시(civitas) 단위로 통합하여 통치하였으며,[* 이들 단어는 각각 [[식민지]](colony), 지방자치(municipality), '''도시(city)'''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가 체계적으로 건설한 도시들은 상당수가 중세에도 도시나 그에 준하는 대촌락으로서 차후 이어지는 유럽 각지의 개척과 개간, 식민 활동 속에서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고대 말 [[로마 제국]]은 역량 고갈과 인접 지역의 발전 속에서 쇠퇴하였으며, 중앙정부는 이러한 압박에 대응하고자 각지 상류층에게 더 많은 공적 부담을 요구하였다. 이에 반발한 상류층은 지방 분리주의적 반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도시를 벗어나 [[영주(중세)|자기 장원으로 이주]]하면서 [[성(건축)|저택을 요새화]]하였다. 이에 따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도시는 위축되었고, 한동안 그 추세가 이어지다가 [[중세]] 성기 상업의 부흥기를 거치며 다시금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말~중세 초기 사이 도시들이 인구 유출이 발생하여도 끝내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탁월한 교통 요지에 위치한 점과 교회의 존재 덕이었다. 원래 초기 [[기독교]]는 각 도시(civitas)마다 전도를 하여 새롭게 주교구를 만들어나가면서 성장하였는데, 옛 상류층이 대거 이탈한 자리를 주교와 예하 사제단이 메꾸면서 행정 능력을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중심지로서 도시의 가치를 존속시켰다. 특히 고대 말 많은 게르만족 이주자들은 장기간의 침공 및 이민 과정에서 설령 종파는 다를지라도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공통점은 토착민과 이주민 간 부드러운 융합에 도움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도시가 자기 역량을 토대로 더 많은 자유와 자치권을 추구하였으며, 지역 영주와 싸워서 쟁취하거나 군주와 제휴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이들 도시민과 주로 충돌한 것은 다름 아닌 지역교회 주교들이었다. 주교의 보호 하에서 도시 기능을 유지하고 농노에서 도시민으로 신분이 변동하였다고는 해도, 도시민들은 더 확실한 인신상 예속에서의 해방과 자치권을 얻고 싶어했다. 따라서 주교와 도시민은 때로는 말이나 돈으로 협상하거나 무력으로 유혈 충돌하면서 각자 권리를 누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군주-제후 간 암투와 [[교황]]-군주 간 정쟁(서임권), 교황-주교 간 갈등(수위권)과 맞물리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이에 관해서는 [[코뮌]] 및 [[자유도시]] 문서 참고.]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연안의 여러 도시 공화국이나, [[코뮌]] 운동을 전개한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등지의 여러 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민은 군주에게서 특허장(Charter: Privilegien)을 받아 시 참사회(혹은 시 의회)와 법정 등 자체적인 행정 체계를 조직했고, 이들은 도시의 이익과 발전을 도모하며 상업발전에 힘을 썼다.[* 이때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 [[늑대와 향신료]]. 중세 도시 관련 내용은 [[중세]] 또는 [[늑대와 향신료/고증|늑대와 향신료의 상업 관련 고증 항목]], 특히 '''[[자유도시]]'''와 '''[[코뮌]]''' 문서를 참조하자.] 그래서 이 무렵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성 안 사람이라는 뜻의 [[부르주아]]라는 말도 이때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그 자체로 특권적인 거주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도시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들어 과밀과 혼잡이 빚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위에서처럼 내/외성으로 도시가 나뉘면서 자연히 소속 인원들의 계급이 갈리게 되었고, 바깥의 시민들이 안으로 들어와서 성공하기 위해 더욱 사람이 몰리면서 도시가 발전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구분이 반드시 내성과 외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구시가지]]'''와 '''[[신도시|신시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종종 기존 시가지 인근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고, 시가지가 확장되고 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양자가 합쳐지게 되었으며, 더러는 한 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기도 했다. 가령 [[아미앵]]의 경우는 염색 산업의 발달로 구시가지 바깥으로 신시가지가 확장되어나간 사례이고, 생캉탱의 경우는 구시가지 인근에 새로 신시가지가 탄생하였다가 구시가지가 신시가지로 흡수된 사례이다. 특히 후자는 오히려 옛 시가지인 베르망두아 쪽이 생캉탱으로 흡수되어 소멸하면서 도시 이름이 아닌 지방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촌과 도시의 구분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는 현대 사회까지 계속되고 있다. 도시의 땅값이 올라 못 사는 사람들은 농촌으로 밀려나 [[이촌향도]], [[귀농]]이 발생한다.] 그런데 도시의 확장 속도에 비하여 도시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기술이나 제도 등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수도(시설)|수도 시설]], 공중 위생, 의료 기술 낙후, 건축 기술의 한계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탓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저 문제들이 흑사병의 '''신속한 전염'''을 유도하게 되었고, 또 한 차례 도시와 상업의 위축을 불러왔다. 때때로 도시는 기념비적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그 도시의 지배자나 통치 국가가 지닌 위엄을 상징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뭔가 거대하고 화려하며 눈에 띄는 것이 권력자를 칭송하는 업적으로서 제격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 등), [[파리(프랑스)|파리]], [[콘스탄티노폴리스]], [[프라하]]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