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선 (문단 편집) === 유해 발굴 === 옥룡사지에는 도선의 부도탑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부숴버렸다는 구전이 내려왔다. 1997년 3월, 순천대학교 발굴팀이 옥룡사지를 발굴하면서 부도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을 발굴했더니 밑에 길이가 95 cm인 석관이 있었고, 석관 뚜껑을 열어보니 오랜 세월 물에 잠긴 채로 인골이 나왔다. 유해가 물에 잠긴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제대로 연대측정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화장한 흔적은 없었다. 뼈의 상태로 보아 피장자는 키 169 cm에 나이가 예순쯤 된 남자라고 추정했다. 발굴팀은 신라인들이 해당 인물의 시신을 먼저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살이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자 추려서 석관에 넣어 모시고 부도를 세웠다고 추측했다. 또한 이 부도를 중심으로 보호전각을 세웠던 흔적이 나왔다. 이처럼 시신을 한번 가매장을 했다가 적당히 시간이 지나 뼈만 남으면 추려서 정식 무덤을 만드는 것은 현대에는 아주 낯설지만, 우리나라의 장례문화 역사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이고 연원이 깊은 풍습이다. 정식 무덤을 만들기 전, 가매장을 하느라 만든 임시 무덤을 우리나라에서는 초빈(草殯) 또는 초분(草墳), 고빈(藁殯) 등으로 불렀다.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심지어 2000년대에도 남해안의 일부 섬 지방에서는 초빈을 만들었었다고 한다.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461|한국민속대백과 사전의 항목 링크]] 해당 인골이 발견된 부도는 다른 데도 아닌 옥룡사지에 있었고 전각을 세울 정도로 중요시되었다. 또한 인근 마을 주민들 사이에도 옥룡사지에 도선국사의 석비가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지므로, 발굴된 인골이 도선국사의 유해라 보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부도탑 밑에서 승려의 유골이 나왔다고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승려가 죽었다 해서 반드시 화장을 하지는 않았다. 화장은 나무가 충분히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돈이 많이 드는 장례법이다. 그래서 승려의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묘비를 대신한 경우도 흔했다. 광양시는 도선의 유해와 부도탑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다. [[파일:광양 옥룡사지 도선국사석관과유골.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