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미티아누스 (문단 편집) ==== 재위 중반 ====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부터 [[팔라티노 황궁]],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네르바 포룸[* 물론 당연히 건설 당시에는 이 이름이 아니었다.][* 짧은 재위를 했던 네르바의 이름으로 남는 행운을 누린 건축물로 원래는 도미티아누스 때 착공된 통로 포룸(카이사르 - 아우구스투스의 포룸 사이의 공간)으로 [[포로 로마노]]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으로 가는 통로였다.][* 도미티아누스가 건설을 시작한 포룸이지만 네르바가 즉위해 사망까지의 기간 동안 완공이 되었고,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해서 네르바의 이름이 붙는 행운을 누렸다.]의 공사를 시작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시작한 콜로세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100년 만에 로마 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하였다. 또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사이 군사상 취약지점인 [[슈바르츠발트]]를 로마 영토에 편입하고 그곳에 처음으로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워 국경선의 방어를 더욱 강화시켰다. 또한 법 집행과정을 공정하고 엄격히 하도록 노력했으며, 공공도덕을 강조하고 유죄로 판결난 사건들을 꼼꼼히 검토해 억울하게 유죄가 된 사건들을 취소시키고 돈에 매수되어 판결을 뒤집은 배심원들을 처벌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이르게 된 이후 로마는 행정관과 속주 총독들의 성실성과 청렴도가 상당히 높아졌고, 로마 일반 시민들에게 축제를 제공하는 등 선심성 정책들을 많이 베풀어 평가가 괜찮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점점 원로원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면서 통치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는 원로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사계급]]을 더 중용한 탓도 컸지만, 도미티아누스의 개인적인 성격과 행동 탓도 컸다. 도미티아누스는 스스로 사치가 심했는데, 그럼에도 타인(특히 원로원과 부자들)에게 유독 엄격했다. 그는 풍속과 도덕적 양심을 이유로 임페라토르 스스로 이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로원 의원들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리스 문화에 심각하게 빠진 나머지 [[동성애]]를 즐긴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풍속 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아울러 그는 베스타 처녀 사제 중 최고 사제 코르넬리아를 비롯한 총 4명의 여사제들을 근친상간과 맹세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따라서 코르넬리아는 여러 명의 애인을 뒀다는 혐의로 [[생매장]]이라는 로마에서 거의 사라져 간 전통 처벌 방식으로 죽고[* 코르넬리아의 애인들로 지목받은 이들은 모두 포룸에서 전통 방식대로 매를 맞아 죽는 [[개죽음]]방식으로 처형됐다.],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된 세 여사제는 스스로 사형 방식을 선택해 살해됐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소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등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허세]]가 심하다고 혹평을 들었는데, 실제로도 로마 상류층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 하지만 이런 평과 별개로 도미티아누스의 대대적인 풍속, 도덕 교화정책에서 모든 로마인들에게 훌륭하다고 평가받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부 극소수의 부자들이 집안 남성노예를 [[거세]]시켜 [[환관]]처럼 만드는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단호하게 이를 금지하고 어길 시 정한 규칙대로 무관용 처벌했다. 또 도미티아누스는 그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던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평가처럼 공적 업무를 볼 때 양심적이고 성실한 황제였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그를 [[독재자]]라고 미워했음에도 자애로운 성격도 갖고 있다고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