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미티아누스 (문단 편집) ==== 황제권 강화와 자기 우상화 ====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반을 제외하고 꾸준히 원로원에게 나쁜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가 매우 비타협적이고 단호했던 성격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황제권을 강화시키면서 자기 우상화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는 이전 여느 황제들보다도 '''원로원을 대놓고 빈 껍데기'''로 여기고 '''황제는 원로원의 말을 충고하고 존중만 해주면 된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줬다. 이는 이전까지 원로원과 관계가 틀어졌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나 치세 중반 이후의 [[네로]]조차 하지 않은 방법이라서 당하는 원로원에서는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네"라고 생각했고, 굴욕감까지 느꼈다. 여기에 더해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원로원보다 황궁 내 관료들에게 실권을 부여하고, 늘 중요 정책을 새롭게 건설한 황궁 안에서 관료들과 처리한 뒤 원로원에 명령조로 통보하는 방식을 일관했다. 그러면서 그는 황궁 관료사회와 원로원에 지속적으로 속주민들을 수혈하면서 새로 들어온 속주민들에게 큰 역할을 부여했다. 따라서 많은 속주민들이 도미티아누스 시대동안 귀족, [[기사계급]]으로 편입됐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트라야누스]] 부자,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친가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리스 출신이나 그 혈통의 동방 출신들이 진짜 많았다. 그리고 이때 황제는 노골적으로 그리스, 동방 출신들에게 집정관 자리까지 여러 차례 추천해 당선시켰는데, 이는 자연스레 본국과 소외된 속주 태생 원로원 인사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그런데 이런 황제권 강화보다 원로원에게 더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황제의 한결 같은 언행이었다. 즉위 직후 몇 개월을 제외한다면 도미티아누스는 늘 원로원에게 역대 황제들처럼 "원로원 여러분"이라는 존중 표현조차 없었고, 늘 상대를 존중하는 말은 모두 생략한 뒤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다[*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던 이전까지의 황제들은 감정대립을 하거나 관계가 험악했어도 늘 원로원에게 존중이 담긴 말을 했다.]. 그런데 이는 원로원뿐만 아니라 속주 총독과 황실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까닭에 지나치게 나쁜 평판을 듣게된 이유가 됐다. 아울러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자신을 지칭할 때 높였고, 원로원에게 자신을 부를 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이시자 신(神))'라고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는 늘 원로원과 고위관료들이 자신과 접견하거나, 황제 자신이 이들을 대상으로 공식연회를 베푸는 공간을 황궁으로 정한 뒤 예법을 만들어 운영했다. 또 그는 역대 황제들과 달리 여러 첩들을 공개적으로 뒀고, 이와 관련해 자신이 첩들과 침대에서 레슬링을 한다[* 이는 실제 레슬링을 한다기보다는 여러 첩들과 [[난교]]를 즐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 때 황궁 정전의 침실 침대 크기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첩들과 난교를 즐겼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발언을 주변에 한 까닭에 이 부분에서도 큰 비난을 받았다. 이는 이전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었고, 이전까지 가장 귀족적이었고 사생활이 난잡했다는 소리를 들은 [[네로]]조차도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언어선택과 행동은 무시와 퉁명스러움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 <아그리콜라>에서 "네로조차도 자기가 명령한 추악한 행위를 목격하는 일을 삼갔다."고 맹비난했다. 이 외에도 그는 원로원 입회때마다 늘 개선장군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했으며, 9월과 10월을 자신이 원로원에게 부여받아 사용을 허가받은 존칭과 자신의 이름을 넣어 게르마니쿠스(9월), 도미티아누스(10월)로 부르도록 일방적으로 바꿨다.[* 여담이지만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롤모델로 삼고 그렇게 행적을 탐독했던 선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정작 7월([[율리우스 카이사르|율리우스]]), 8월([[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자기 이름으로 하는 걸 거절함으로서 관행을 끊어버렸다. '''"황제가 12명이 넘으면 어떻게 할 거냐?"'''라는 일침도 함께. 해석하기에 따라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참고'한 것이며, 원로원을 깔아뭉개는 데는 한술 더 떴기 때문에, 되려 이 일화를 알았기 때문에 9월과 10월을 자기 이름으로 삼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록말살형에 따라 도미티아누스 사후 9월과 10월은 원상복구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헤겔 1승 추가]]~~] 또 원로원 의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델라토르 제도'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런 그의 정국 운영은 원로원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런 양측의 갈등 관계는 85년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종신 재무관직에 취임하면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재무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또한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종신 재무관 취임은 원로원 의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반역죄를 활용함에 있어서도 이전 황제들보다 뻔뻔하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데다 숙청대상 역시 광범위한 탓에 원로원에서 불만이 상당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숙청하기로 결정한 자신의 재산관리인, 전직 집정관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반역죄로 죽이기 전 이들에게 상냥하게 굴고 인내심을 시험한 뒤 십자가형으로 죽이거나 과거 죄인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사형시켰다.[* 숙청이 결정된 자신의 재산관리인을 구슬리며 뻔뻔하게 자신이 주최한 저녁식사 자리에 손님으로 초대시켜 융숭히 대접하고 온갖 말로 안심시킨 다음 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또한 아레키누스에게는 함께 여행가자고 말한 뒤 친구로 잘 대해주다가 돌아온 뒤 반역죄로 죽였다.] 아울러 이전보다 잔인한 방법의 취조 방법과 고문법[*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항문에 불붙은 막대기를 삽입하는 고문법을 개발했다고...]을 개발해 정적들의 주변 사람들을 고문해 증거를 얻어내고, 이를 증거삼아 정적을 고발한 뒤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으로 제거했다. 이런 까닭에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고 회복불가수준으로 치닫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