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굴 (문단 편집) === 중국 === [[후장(동음이의어)|후장(厚葬)]] 풍습이 성행하여 보물을 부장품으로 무덤에 같이 묻자, 당연히 도굴도 기승을 부렸다. 역대 왕조가 도굴을 엄금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진시황릉]]은 도굴되지 않았지만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후의 황릉들은 도굴당하지 않은 걸 찾기가 더 빠르고, 진시황릉 이전에 조영된 지배층의 무덤도 무사하지 못했다. [[낙양]]의 [[북망산]] 같은 대표적인 무덤군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산 전체가 무덤으로 가득차 더 이상 묏자리를 찾기 힘들자 백성들이 [[왕가의 계곡]]처럼 기존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버리고(...) 내부를 손질한 다음 재사용하기까지 했다. * [[한나라]]: [[서한]]의 황릉은 [[적미군]]이, [[동한]]의 황릉은 [[동탁]]이 도굴했다.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조조]]는 아예 군자금 확보를 위해 제왕관민들의 무덤을 '''전문적으로 도굴하는''' 발구중랑장, 도금교위 관직을 설치하여 부대까지 운영했고, [[손권]]도 마찬가지로 왕릉을 몇 개 도굴했었다. 특히 손권은 자기 형 사당 짓겠다는 이유로 도굴하기도 했고 조조 아들인 조비는 신하 놀려주려고 도굴하기까지 했다. * [[송(남조)]] : [[전폐제(유송)|전폐제]]가 [[계모]]이자 [[고모|당고모]] [[패륜|은귀비의 묘지를 파헤치고 부장품을 싹쓸이 털어갔다.]] 전폐제도 대단히 악질적이었던것이 패륜행위도 문제지만 이놈도 조조처럼 도굴관직에 관심이 많았는데 조조는 그래도 군자금 확보라는 나름의 이유라도 있지 이쪽은 그런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관심은 많았지만 실제로 만들지는 않은 모양이다. * [[수나라]]: [[수문제]]의 태릉은 검소한 탓에 부장품이랄게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군벌/중화민국|중화민국]] 때 [[군벌]]들이 도굴하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이 별 것 없으니 하지 말라고 ~~어떻게 알았지?~~ 했음에도 도굴했지만 정말 별 게 없었던 모양. * [[당나라]]: 당십팔릉 중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은 서쪽 반을 파도 안 나와서 포기했지만, 나머지 황릉 17기는 [[오대십국시대]]에 온도가 모두 도굴했다. * [[송나라]]: [[북송]]팔릉은 [[금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 유제가, [[남송]]육릉은 [[원나라]]의 요승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 [[금나라]]: [[베이징]] 대방산에 있던 금나라 능묘군은 원나라 때 도굴당해 껍데기만 있었는데, [[천계제]] 때 [[명나라]] 조정이 [[후금]]의 기운을 끊는다며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 [[명나라]]: 명십삼릉은 도굴당하지 않았지만 지상부의 건축물은 청나라가 능묘공사에 쓰려고 대부분 훼손했다.[* 2013년에는 [[홍희제]]의 헌릉을 도굴하려다 계단만 훼손하고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http://naver.me/5NdgWmmu|#]]] * [[청나라]]: 청동릉은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 부장품이 부채와 신발뿐이라고 전해졌다.] 모두 청 멸망 후 군벌 난립 시대에 도굴당했다. [[동릉 도굴 사건]] 문서 참조. 청서릉은 [[광서제]]의 숭릉을 제외하고는 도굴당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