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검제일주의 (문단 편집) == [[일본]] 문화 속 도검제일주의 == 이 문서에서 도검만이 세상 모든 무기보다 뛰어나며, 다른 무기를 놔두고 칼 한 자루만을 든 캐릭터을 내세우는 유형의 도검제일주의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거의 대부분 일본 문화, 특히 근대 이후의 프로파간다나 현대의 대중매체에서 엿볼 수 있다. ~~나무위키를 하고 이 페이지를 보는 독자들이 대부분 [[오타쿠|일본의 도검제일주의 클리셰가 들어간 작품을 즐겨볼 것]]이라 전제했다.~~ 구미(歐美)권도 그러하지만 [[일본]]은 그 경향이 더욱 심한데 심지어 일본인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기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해야 할 상황에서도 많은 조종사들은 도검을 가지고 착용하고 탑승했다. [[A6M]] 문서에도 있지만, 이들은 성능이 안 좋다는 판단이 들자 '''무전기를 뜯어내고, 안테나를 톱질했다'''. [[무사도]]라는 이유도 있지만 [[일본군]]은 [[조종사]]에게 [[남부 권총|호신용으로 쓸 만한 권총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최소한의 호신 대책이기도 하다. 심지어 얘네들은 '''[[기관총]]에마저도 착검기능을 달아놨다'''.[* [[96/99식 경기관총]]이 그 물건인데 여기서의 착검은 일반적인 총검이 아닌 도검제일주의에 환장한 일본군답게 '''51cm'''나 되는 군도도 착용할 수 있게 한 거다. 착검을 하면 무거운 무게로 인해 반동제어가 용이해져서 명중률이 올라가는 '''의외의 이점'''이 있지만 그만큼 총열이 휘어서 못 쓰게 되는 '''당연한 단점''' 또한 존재했다.] [[총검]]으로 [[전차]]를 상대하겠다는 [[대전차 총검술]] 같은 전술이 버젓이 있을 정도다. [[파일:nz.jpg]] 일본의 도검제일주의가 [[에도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으나 휴대의 편리성등의 이유로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에도 이런 생각은 만연해 있었다. 선조실록과 왜란 시기 의병장들의 기록에도 조총과 왜검이 일본군의 주력 무기로 묘사돼 있고 인조실록에는 왜병들이 모두 검술을 배웠기 때문에 조선군을 단병전에서 압도할 수 있었으며 전투의 승패는 결국 단병전에서 결정이 나고 단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술이라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근접 백병전 자체가 비숙련자가 맨정신으로 할 짓이 아닌데, 비교적 검술에 숙련된 일본군이 괴성을 지르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월녀|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궁병(射者)·창병(槍者)·총병(銃者)·기병(騎者)이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과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 四技. 앞에서 말한 궁술, 창술, 사격술, 기마술.]가 모두 쓸모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쟁(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기사) >----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기사) 에도 시대 때는 도검이 대놓고 '''[[사무라이]]의 신분증''' 역할을 했으며 사무라이가 [[할복]]을 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였고 지체 높은 사무라이들이 [[할복]]에 쓴 도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름값이 생겼다. 무엇보다 일본의 각종 도검술의 근간이 시작된 것은 전국시대 이전인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였다. 즉 도검제일주의는 사무라이와 함께 해온 셈이다. 전시의 집단전뿐 아니라 평시의 개인 전투에도 임했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내린 결론은 상황에 맞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 주도권을 유지한 채 변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 목적이며 긴 무기와 짧은 무기를 두루 익힘으로써 [[오륜서|책]]의 주제인 [[이천일류|병법의 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삶에 비하여 과장된 평가를 받는 무사시를 제외하더라도, 전국시대의 검호이자 [[가토리신토류]]의 개조인 [[이이자사 이에나오|이이자사 초이사이 이에나오]]의 경우에는 창술이 주특기였고, 다른 유파들도 창술과 나기나타는 교수 체계에 반드시 포함시켰다. 이렇듯 근대 이전의 도검제일주의는 어디까지나 칼이 단병전에서 필수적이고 다방면으로 쓸 만한 무기라는 인식에 한정돼 있었다. 이는 서양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 일본의 상무정신을 보면 개별 무기보다는 [[엘랑 비탈|무기를 쓰는 군인, 전사, 기사 등의 전투정신]]이 중요하고 무기는 그걸 실현하는 도구라는 사고방식이 우세했다. 당장 위에 사례로 든 무사시의 이천일류, 신카게류 등등 일본 고류에는 종교적인 색채도 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