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탕트 (문단 편집) ==== 공산진영의 내분 ==== * [[중국-소련 국경분쟁]] 문서로. 냉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소련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던 공산국가래야 [[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정도였고, 그나마도 [[티토]]가 자의적으로 소련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서방세력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아직 두 초강대국간 갈등이 구체화되지 않았던 시점에서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성격이 강했기에, 공산주의의 확장 자체를 경계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패권의 쇠락으로 인해 독자적으로 [[소련]]과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부담을 느끼게 된 미국은, 당시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공산진영의 내분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스탈린]] 사후 당중앙의 과도한 소련중심적 노선과 후임 서기장들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공산권 내에서도 1956년의 [[헝가리 혁명]]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사태 등 산발적인 저항이 발생하곤 했다(물론 곧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미국의 레이더에 포착된 결정적인 사건이 [[중국-소련 국경분쟁|중소 분쟁]]이다. 양국의 공산진영의 패권을 둘러싼 대립구도와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던 [[마오쩌둥]]의 [[중국]]은 스탈린으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한 [[흐루쇼프]]의 [[소련]]과 이념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결국 1969년의 국경분쟁이 도화선이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 다행히도 이는 미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큰 피해없이 마무리되었지만, 공산권의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중국과 소련은 도합 140만 이상의 군인들을 비상 동원했으며, [[핵전쟁]]까지 유발할 뻔했던 위험한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은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은 소련 견제 및 압박이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1971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로도 유명한 미국의 안보담당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방중]]을 시작으로, 1년 뒤에는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닉슨-마오쩌둥 회담|방문]]하고 각종 회담에 참석하는 등 양국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1979년 미-중간 외교관계가 상당히 좋아지기에 이른다.[* 소위 핑퐁외교로 유명하다.] 중국의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이 시기의 냉전은 기존의 [[미국|양극]] [[소련|체제]]에서 [[미국|다]][[중국|극]] [[소련|체제]]로 불리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