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탕트 (문단 편집) ====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패권의 변화 ==== * [[베트남 전쟁]] 문서로. 당시 베트남은 1955년의 남북 단독선거를 기점으로 [[자유민주주의]] 친미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과 [[공산주의]] 친소정권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의 유지를 원하였으나,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은 분단의 고착화를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베트남 인민들도 미국의 괴뢰 정부라는 인식과 남베트남 정권의 부패로 인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형성, 북베트남과 협력하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국은 1964년의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일부 동맹국들과 함께 직접 개입을 선언하였으나 미군은 이미 민심을 잃은데다 형편없는 수준이던 남베트남 군대에 의지하여, 소련의 개입 가능성으로 인해 남베트남 내에 발이 묶인 채로 끝없이 베트콩들과 의미없는 소모전을 수행해야 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국내외의 강력한 [[반전]] 여론과 재정적 손실을 무릅쓰고 10년 이상 전쟁을 지속했으나, 결국 1975년에 이르러 3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만을 남긴 채 굴욕적인 종전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고, 미국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친 여파는 단순히 수치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국을 자처하던 미국이 [[소련]], 하다못해 중견급 공산국가[* [[폴란드 인민 공화국]],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도 아닌 당시 최빈국 중 하나이던 베트남에게 사실상 패배했다는 사실은, [[제1세계]]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이 약속한 안보의 보장을 의심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나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와 사회적인 반전 분위기는 미국이 더이상 [[제1세계]] 국가들의 리더로써 공산진영에 대한 일방적인 강경책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북한은 예외. 대한민국은 남베트남과 다르게 막장국가가 아니었고 중국과 소련이 등 돌릴 정도로 북한이 유엔 장교 2명이나 사살한 막장짓거리 했으므로 미국이 북한 상대로 개입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