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옌다 (문단 편집) === 반장활동 === 2기 3중전회 이후 [[허샹닝]], [[쑹칭링]] 등과 힘을 합쳐 당권의 공고화, 군사독재의 방지, 반혁명 세력 타도를 천명하고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용공분자로 분류되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난징 국민정부로부터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덩옌다는 4월 15일 우한에서 개최된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즉각적인 난징 토벌을 비롯한 강경론을 주장했으나 [[구멍위]] 등의 반대로 장제스에 대한 출당으로 조치를 마무리하고 [[펑위샹]]과 제휴하기 위해 북벌을 재개하게 된다. 6월에 열린 정저우 회담에서 펑위샹과 회담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펑위샹은 오히려 쉬저우 회담에서 장제스와의 동맹을 선언하고 우한 국민정부 측에 청당을 실시할 것을 압박하였다. 1927년 6월 말, 우한 국민정부의 불리한 정세를 의식하여 국민당 내부의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으며 담평산과 함께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3당의 입장으로 혁명을 수행하였다. [[국공결렬]] 이후 이에 반대하여 7월 13일, 성명을 발표하여 [[왕징웨이]]를 크게 비판하였고 [[쑹칭링]], [[천유런]]과 함께 "[[쑨원|전 총리]]의 유언에 따라 [[삼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진정한 혁명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11월 1일, 모스크바 선언이라 불리는 <중국과 세계 혁명 민중에 대한 선언>을 발표, 중국 국민당 임시 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장제스를 신군벌로 비난하며 반장운동을 이어나갔다. [[난창 폭동]]이 일어났을 때는 홍군으로부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혁명행동>을 발행하고 제3차 인터내셔널에 참석하였으며 독자적인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때 [[코민테른]]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중국의 혁명은 중국인들의 일이므로 절대로 코민테른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 연설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분노를 사게 되어 모스크바를 떠나 캅카스를 경유, 베를린으로 망명지를 이동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압박과 [[천유런]]과의 염문설,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던 쑹칭링이 베를린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다시 그녀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베를린에 머물면서 혁명이론 연구 활동을 광범위하게 벌였으며 국민당 좌파 망명인사들을 규합하여 학회를 조직하고 쑹칭링과 함께 중국의 토지와 농민문제에 대해 같이 연구하였다. 1930년 5월, 유럽과 아시아를 두루 방문한 후 상하이를 통해 영구귀국하여 혁명의 연구와 반장활동을 이어나갔다. 1930년 8월 9일, 덩옌다는 상하이 공공 조계지에서 비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제1차 전국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으로 개칭하고 중앙기구를 정식으로 설립하여 <혁명행동>, <혁명행동일보>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하였으나 제국주의와 난징 국민정부 역시 매섭게 비판하였다. 장제스는 3당의 활동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고 이들이 죽지 않으면 국가가 평화롭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공산당 역시 덩옌다를 비판하며 덩옌다에 대한 비판 투쟁을 진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