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생애 (문단 편집) === 남순강화 ===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와 그 후폭풍으로 경제 개혁과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개혁 · 개방을 계속 밀어붙이면 소련처럼 1당 독재 체제의 붕괴를 재촉시킬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들 보수파들은 개혁 · 개방, 자본주의 시장 경제 도입을 여기서 멈추고 당에 의한 통제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강경대처한 공로로 단숨에 중앙정계에 진입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 약속했던 추가적인 개혁 · 개방, 시장경제화는 모두 미뤄졌고, 극도의 정치적 경색이 이루어졌다. 잔인한 천안문 유혈진압에 격분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은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해서 모든 방면에서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며, 덕분에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실추되었다. 하지만 서구권은 중국을 적성국으로 규정한다거나 무역을 봉쇄하지는 않았다. 천안문 사태 직후에는 최혜국 대우 연장불가, 경제제제, 무역중단 같은 조치들도 거론되었으나 결국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냉전이 막 종식된 상황에서 중국을 또다시 적성국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기에는 정치권이나 대중들이나 모두 피곤했으며, 당시 10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을 놓치기도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의 처형과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때문에 천윈 등은 계급투쟁을 다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개혁개방의 전면 후퇴를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장쩌민은 경제 건설로 공산당 지위를 굳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장쩌민의 실질적 정책은 모두 사상 강조, 정치 통제의 강화에 있어서 이 부분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의 완고한 태도에 자신이 죽고 나면 개혁개방이 무산되고 자신이 그저 천안문에서 학생들을 죽인 살인마로만 기억될 것을 우려한 덩샤오핑은 후치리, 옌밍푸 등 숙청당한 개혁개방파를 복권하고 심지어 자오쯔양의 복권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장쩌민을 압박했다. 하지만 보수파의 완고함이 바뀌지 않자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소위 ''' 남순강화 '''라고 일컫는 행보를 시작한다. 이는 명목상 가족여행이었고 덩샤오핑은 실제로 여러 명소를 방문하면서 관광을 즐기는 듯 했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가족여행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당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양상쿤]]이 동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여행 준비에서 당은 배제되고 인민해방군이 준비를 맡았으며 중군위 비서장 양바이빙이 [[총정치부]], [[해방군보]]를 동원하여 인민해방군의 덩샤오핑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다. 1월 17일,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떠난 덩샤오핑은 먼저 후베이성 [[우한]]과 후난성 [[창사]]를 방문, 후베이성 서기 관광푸와 후베이성장 궈수엔에게 중앙에 전하라면서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우리 지도자들은 마치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어치 있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회의와 행사 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텔레비전 스타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 (...)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선전]]과 [[주하이]] 방문에서는 "개혁개방 노선, 정책, 방침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라도 타도될 것이다.''' 이점에 대해 나는 몇차례 언급하였다."라고 또 경고를 날렸다. 보수파가 우세하였던 [[중공중앙]] 지도부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평당원의 가족여행으로 폄하하면서 보도를 금지하였으나,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홍콩의 [[명보]], 대공보 등이 취재를 시작하였고 홍콩 언론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던 [[광둥성]]과 [[푸젠성]]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해방일보, 선전특구보 등 지방언론들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2월에 이르러 [[인민일보]]도 굴복하였다. 3월부터 선전특구보를 중심으로 덩샤오핑의 현지지도를 매우 자세히 보도하기 시작했고 광저우 양청만보, 광명일보, 문회보에 이어 [[신화통신]]이 전국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동정을 보도하였다. 덩샤오핑의 뒤에 중군위 제1부주석 양상쿤, 중군위 비서장 겸 총정치부 주임 양바이빙, 중군위 부주석 [[류화칭]] 등 중국의 군사지도자들이 모두 따라붙었으며 심지어 장쩌민의 경쟁자인 정법위 서기 [[차오스]]까지도 덩샤오핑쪽에 서면서 중국 지도부는 경악하였다. 덩샤오핑은 군대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보수파에게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남순강화가 끝난 후인 8월에 전국 군구의 사령관들이 개혁개방을 옹호하는 궐기 사설까지 내보내면서 총이 누구 손에 있는지가 매우 명백해졌다. 장쩌민은 2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덩샤오핑에게 새해 안부 전화를 걸면서 아부를 해야 했고, 중앙문건을 통해 전국 각지의 간부들이 남순강화에 대해서 학습하게 하였다. 2월 21일, 덩샤오핑은 의기양양하게 베이징으로 개선하였다. 3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가 남순강화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정, 3월 11일자 신화통신을 통해 정치국 공보를 발송하여 전국에 알리게 했다. 덩샤오핑은 5월 22일, 서우두철강 현지지도 때 지도자는 반드시 경제통이어야 하며 주룽지야말로 경제를 확고히 장악했다고 그를 크게 칭찬, 장쩌민에게 계속 까불면 [[주룽지]]로 총서기를 교체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장쩌민은 14차 당대회에서 자신이 몰락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여 "14차 당대회에서 누가 보고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라고 넋나간 소리를 할 정도였다. 천윈과 보이보는 이미 [[총서기]]를 두번이나 찍어냈는데 세번째로 갈아치울 순 없다고 장쩌민 지지를 분명히 했지만 장쩌민은 덩샤오핑에게 완전히 기울어 5월 29일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중앙당교]]에서 열린 성부급 간부 연수반 졸업식에서 덩샤오핑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줄을 대게 되었다. 천윈은 중앙고문위원회를 소집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덩샤오핑의 선동으로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이 개혁개방을 요구하면서 중앙을 압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국무원]] 부총리 톈지윈을 비롯한 남순강화에 고무된 개혁개방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톈지윈은 극좌파들을 좌파 특구를 만들어서 격리해서 평생 배급이나 받아처먹고 쇄국주의나 하면서 살게 만들자는 폭탄발언까지 했으나 원로들의 항의에도 덩샤오핑이 별거 없는데 웬 소란이냐고 톈지윈을 옹호하면서 보수파는 몰락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의 마지막 개방 vs 쇄국의 대결에서 승리한 덩샤오핑과 개방 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 [[NBA]]를 라이브로 중국 공영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한거나 같은 해에 [[상하이증권거래소]], [[선전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 내부 개방 반대세력인 보수파의 수장은 덩샤오핑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천윈(진운, 陳雲)으로, 덩샤오핑이 먼저 죽으면 보수화가 진행되고 천이 먼저 죽으면 개혁 개방이 유지된다는 것이 당시 해외 중국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본디 천윈이 병약했던지라 덩보다 일찍 갈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예측이었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인해 의외로 장수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남순 강화 직후 천윈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은 이미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자신이 밀렸음을 인정하는듯한 발언도 했다. 이후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의 당 규약 개정으로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어 천윈은 은퇴했고, 1995년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그보다 2년 뒤에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