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여담 == * [[삼국지]] [[등애]]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 생전에 주로 [[쓰촨성]] 광안 방언을 사용했고 항상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 중공 정권이 성립되어 교육기관이 정비되기 이전까지는 일상 생활은 물론 학교에서도 해당 지역의 방언만 사용했다.(요즘은 아무리 오지라도 소수민족 학교가 아닌 이상은 거의 [[표준중국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당시 덩샤오핑이 저랬던 건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말이 안 통하는데도 한자로 필담하던 중국 대륙이 웃길 따름-- 현재도 문혁 시절 학교를 못 다닌 60대 이상에서는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의 연설은 중국의 관료들이 그렇듯 [[보통화]]로 했다. 대표적으로 천안문 진압 후 기자 간담회에서 학생운동을 "난동"(...)이라고 비난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0RQwR7F_EPw|발언]]. * '탁구 외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중 정책에 따라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이후, 이에 보답하여 1979년에 방미를 했는데 우주 비행 훈련소에 방문을 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를 훈련하는 기기를 탔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떠나길 주저했다고.[* 사실 중국의 우주 계획은 나름 장기 추진된 계획이었다. 과학 기술 개혁 항목 중 하나였기 때문.] * [[김용(1924)|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083224#home|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다.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프랑스]] 유학의 영향인지 [[크루아상]]과 [[콘트락트 브리지]] 게임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총리로 복권된 이후 해외에 파견되었는데, 귀국시 외국 공항에서 크루아상을 사와 중국에서 부하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마작]]과 [[포커]]를 매우 좋아해서 충칭 시장으로 재임시에 집무실에 사람을 불러 자주 했는데 이것이 [[문혁]] 때 비판되어 실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주더]]나 [[펑더화이]]는 장기를 좋아했고, [[워커홀릭]]인 [[저우언라이]]는 업무에 바빠 놀 여유가 없었으며,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엄청난 [[골초]]였고 외국 정상들을 접견할 때조차 [[재떨이]]를 앞에 두고 항상 줄담배를 피웠다.[* [[유튜브]]에 올라온 기록 영상을 보면 [[김일성]]이 방중해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담소하면서 맞담배를 피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본인]]도 이게 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상회담 시 사진 찍을 때는 치웠다가 끝난 후 다시 내왔다. 이렇게 골초였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자들이 자주 걸리는 [[폐암]]이나 [[후두암]]에 걸리지 않고 92세까지 [[장수]]하였다. * 매운요리를 즐겨먹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마오쩌둥과 비슷했다. 다만 식사시간을 꼬박꼬박 지켰고 과식을 피하고 소식을 했는데 이것이 장수비결이라고 평가받는다. * 살아생전 [[장쩌민]]-[[리펑]]-[[주룽지]]의 2세대 지도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3세대 지도부 승계를 계획하기도 했는데, 이게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면서 과장 좀 보태자면 2012년까지 30여년간 덩샤오핑이 중국을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치면 3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영향력을 휘두른 셈이 된다. 물론 후세대들이 다 그의 말대로 행동한 것도 아니긴 하다만. 이 중 원자바오를 점 찍었다는 점에선 좀 흥미롭기도 하다. *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입수한 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같이 봤었다. 처형 비디오를 보고 나서 덩샤오핑이 한참 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었고, 이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 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덩샤오핑이 불과 수개월 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후의 남순 강화를 통해 개혁 개방에 가속도를 붙인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불식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길은 대외 개방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 성장 성과의 극대화 뿐"이라는, 나름대로 절박한 인식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물론 현실은 개혁 개방 와중에 반동 분자 색출까지 둘 다 했지만. * 1991년 아무런 직위 없이 있을 때 [[김일성]]과 비밀리에 만나 개혁개방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1994년까지 [[라선특별시|나진]] 개방, 비핵화 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일]]에게도 이 조언을 해줬는데 김정일은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하며 거절하였다고. 다만 김정일도 2000년대에 들어 [[신의주시|신의주특별행정구]]처럼 비슷한 노선을 모색하긴 했었다. 허나 전권을 주려고까지 했던 중국인 장관 후보가 오기 직전 탈세 혐의로 중공에 체포되고[* 때문에 당시 중국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꺼려한다는 식의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이후 북미 외교 등이 잘 안 풀리자 2000년대 중반 핵실험으로 자폭해 끝이 안 좋았을 뿐. 헌데 정작 마오쩌둥이 반대했던 북한의 권력 세습은[*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렇다면 우리가 전제 군주와 다를 게 뭐냐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공산당은 전제주의를 봉건제도의 유산으로 보기에 싫어한다.] 찬성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마다 맞는 게 있다는 게 일단은 표면적인 찬성 이유. * 1994년 중국 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던 월드컵 전 경기를 위성으로 시청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실제 덩샤오핑 집권 시기에 처음으로 [[CCTV]]에 유럽 축구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이때 주로 방송하던 리그가 이탈리아 [[세리에 A]]였다. 때마침 이 때는 세리에 A 최고의 전성기 시절의 이른바 '''"칠공주"''', '''"세븐 시스터즈"''' 시대였고, 이때를 계기로 중국에서 세리에 A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994년 갑을 리그라고 부르던 프로 축구 리그를 창설하는데 기여했으며[* 나중에는 [[중국 슈퍼 리그]]로 명칭이 변경된다.] 살아생전 국가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도 보고 싶어했으나,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덩샤오핑 [[본인]]도 중국이 월드컵 본선은 출전한 것은 보지도 못한 채 1997년에 사망했다.[* 참고로 중국은 그해 열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란]]에게 밀려 최종 3위로 탈락하였다.] 그런데 정작 관중 우려 등으로 축구장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0년 [[대만]] 총통부 직속의 역사편찬기관 국사관(國史館.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이 인터넷으로 '중화민국 100대 인물'의 선정 투표를 실시했는데, 덩샤오핑이 중간 집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황한 대만 정부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을 후보에서 제외했고 결국 조사 자체를 취소했다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10/2010121000125.html|#]] --대륙 아이피가 몰려온 듯-- *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는 덩샤오핑을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했어도 항상 그를 염려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이나 실각하여 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됐지만 몇 년 후 마오쩌둥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당한 대부분의 중국 정치가와 공직자들은 실각 후에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거나, 강제 노동소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혹은 감옥에서 복역 중 사망하거나, 혹은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범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신임을 받은 셈. * 작은 키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라고 하자 당연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그럼 모두 내 의견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실행하겠소.'라고 했는데 실제론 덩샤오핑 혼자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실제론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선 덩샤오핑을 발견했지만, 덩샤오핑을 아낀 마오쩌둥이 '덩샤오핑 동지는 어차피 키가 작아서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똑같아 보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라며 그냥 넘어갔다는 말도 있다. * 살아 생전에 세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만]]과의 [[양안통일]], 두 번째는 [[홍콩]]의 [[홍콩 반환|반환]]을 보는 것, 세 번째는 자국이 [[FIFA 월드컵]] 본선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가지 중 첫 번째를 제외하고 모두 덩샤오핑이 죽고 나서 이뤄졌는데, 먼저 두 번째는 덩샤오핑 사후(死後) 5개월 뒤에야 자국에 반환이 되었고, 이어서 세 번째 역시 [[2002년]]에야 본선에 진출하긴 하였지만, 첫 번째는 아직도 이뤄지지 못 하였다. 그나마 덩샤오핑이 꿈꾸던 [[통일]]도 공산당 위주의 양안통일이었는데, 그게 --죽었다 깨나도-- 가능할진 의문. * [[일본]]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자리에 있을 때 일본과 경제, 문화 교류를 허용했다. 이때 일본에서도 중국 요리나 관광 붐이 일었는데 이때를 노리고 나온 만화가 [[란마 1/2]]이나 [[쿵후보이 친미]] 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자국 내에서도 일본 문화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족쇄를 풀었다. 한국은 일본 문화 개방이 2000년대 초에나 이루어져서 중국도 그런줄 아는데 중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특촬물을 무삭제로 공중파 TV에서 보는 환경이었다.[[북두의 권]]을 거의 무삭제로 틀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일본 문화 오타쿠들은 대부분 이 세대인 30~40대이다. 인구 수가 엄청나다보니 저때 방영한 더빙 애니메이션을 전편 녹화한 기인들도 많아서 저 당시 더빙작들은 지금도 더빙 자료가 그대로 남아있다. * 표현의 자유나 해외 문화가 중국에 퍼지는 거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좋은 걸 많이 봐야 인민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고. 오히려 너무 풀어줘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은 이런 생각은 바꾸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도 다들 덩샤오핑의 눈치를 봐서 감히 문화통제 정책을 하지 못했다. 덩샤오핑이 죽은 뒤부터 눈치볼 게 없어진 중국은 문화통제 정책이 강해진다. * [[대한민국]]의 전직 [[합동참모의장]] [[이순진]]과 굉장히 닮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