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흥대원군 (문단 편집) == 사망과 이후 == [[1559년]](명종 14년) 6월 14일[* 음력 5월 9일.]에 사망했다. 향년 29세. 일찍 죽은 결과 자신의 3남 [[선조(조선)|하성군]]이 왕이 되는 로또를 맞았다. 주색에 빠져 요절한 상황에다가 [[하동부대부인|그 아내]]도 일찍 죽으면서 [[선조(조선)|하성군]]이 최적의 왕위 계승자감이 된 것이었다. [[선조(조선)|하성군]]은 친부모도 일찍 여읜 데다가 할머니인 [[창빈 안씨]]도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명종(조선)|명종]] 재위 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한테 매우 매력적인 [[양자(가족)|양자]]감이었다. [[제안대군]]같이 [[예종(조선)|예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너무 어리거나, 대신들이 옹립시킨 [[성종(조선)|성종]],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 같은 왕들은 대부분 장남도 아니었고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정통성이 떨어지고 어린 왕이 대신들이 권력도 나눠 가질 수가 있었고 다루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내내 대신들에게 휘둘리고 약한 왕권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선조(조선)|선조]]는 실제 혈통으론 [[중종(조선)|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예로 조선 9대왕인 [[성종(조선)|성종]]도 숙부인 [[예종(조선)|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했다. 그리고 애당초 [[중종(조선)|중종]]의 적통인 [[인종(조선)|인종]], [[명종(조선)|명종]]이 다 후사없이 죽은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왕족이 [[중종(조선)|중종]]의 서손들이란 것도 고려해야 한다.] [[명종(조선)|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아들을 낳지 못한 [[명종(조선)|명종]]은 조카들을 종종 궁으로 불러 잔정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일찍 잃은 덕흥군의 세 아들들에게 특히 관심을 많이 주었다. [[순회세자]] 사후 [[명종(조선)|명종]]의 건강도 안좋아졌기 때문에 만약 그대로 [[명종(조선)|명종]]이 후사없이 죽는다면,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관련된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가 있다. 바로 누나 [[문정왕후]]를 뒷배로 두고 전횡을 일삼던 '''[[윤원형]]이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 중 한 명과 혼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도 원래 본부인 김씨 소생이 아니라 측실 출신이었던 [[정난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단, 저 때 [[정난정]]은 정실이었다. 본처 김씨 부인을 몰아내고 차지한 건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정실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 부인을 독살했다.] 차기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덕흥군의 아들을 사위로 삼는다면 향후 자신이 [[부원군]](국구)이 되어 권세를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정왕후]]가 승하했고, 끈 떨어진 [[윤원형]]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그러자 그동안 [[윤원형]]을 벼르고 있었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윤원형]]의 죄상을 26가지나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덕흥군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던 일이었다.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의 봉서 >---- >(전략)... 측실 소생을 [[사대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옹주|옹주(翁主)]]를 하가(下嫁)하는 예법입니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아들은 [[중종(조선)|중종 대왕]]의 손자이고 벼슬이 정2품인데, [[정난정|측실]]의 소생을 존귀한 사람과 혼인시키려고 도모했으니 명분을 범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과연 임금을 의식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후략) >----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1565년]] 을축 / 명 가정(嘉靖) 44년) 8월 14일(무인)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ma_12008014_001|#]] 어쨌든, 결국 [[명종(조선)|명종]]은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덕흥군의 3남 [[선조(조선)|하성군]]이 보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선조(조선)|선조]]이다. 덕흥군은 [[선조(조선)|선조]] 즉위 2년 후인 [[1569년]](선조 2년)에 '''[[대원군]]''' 작위를 추증받았다. 다만, 왕으로까지 추존받지는 못했다. [[선조(조선)|선조]]는 그러려고도 하지 않았고, 단지 덕흥대원군 봉사손[* 제사를 받드는 장손. [[선조(조선)|선조]]에게 두 형이 있었는데, 큰형 [[하원군]]의 자손들이 덕흥군 제사를 받들었기 때문에 그를 봉사손이라고 특정하는 것이다.]을 1품으로 세습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추존]]의 예는 왕이라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성종(조선)|성종]]이 추존시킨 [[의경세자|덕종]]의 경우는 세자였다는 명분이 있어서 [[성종(조선)|성종]]이 선왕의 양자로 들어가 족보상 아버지가 아님에도 추존할 명분이 있었지만 덕흥군은 세자였던 적이 없는 일개 왕자여서 추존의 명분이 부족했다. 물론 [[선조(조선)|선조]]가 즉위하기 50년 전쯤에 [[명나라]]에서 [[가정제]]가 [[홍치제|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갈 여지가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엄청난 대립 끝에 [[주우원|아버지]]를 황제로 추존한 일이 있었으니, 만약 [[선조(조선)|선조]]가 [[가정제]]의 사례를 빌미로 내세워 추존을 밀어붙였다면 덕흥군의 추존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선조(조선)|선조]]는 그러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0211001_001|《선조수정실록》 3권 2년 11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909002_005|《선조실록》 203권 39년 9월 2일.]]] 하지만 덕흥대원군의 증손자 [[인조]]는 얄짤없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추존하는데 [[정원대원군|성공]]했다. 비록 왕으로 추존받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조선)|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도정궁 봉사손은 조선시대 내내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을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에 자리했던 도정궁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다가 [[1913년]]에 화재로 대부분 불탔고 직후 재건되었으나 후손들이 1950년대에 매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