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흥대원군 (문단 편집) == 생애 == 1530년(중종 25년) 4월 2일[* 음력 3월 5일.]에 [[중종(조선)|중종]]과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졌으며, 13살 때 [[정인지]]의 [[하동부대부인|증손녀]]와 정식으로 [[결혼|가례]]를 올렸고 그 사이에서 [[선조(조선)|선조]]를 포함한 아들 3명과 딸 1명을, 첩 사이에서 딸 1명을 더 얻었다. 다음 기록들로 볼 때 성품이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사실 조선 왕족, 종친들 치고 덕있고 인망 있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조선의 왕족들은 조금이라도 덕망이 있거나 유식하면 곧바로 역모에 엮이거나 역적으로 모함을 당해 죽거나 유배를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굳이 과거를 봐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아도 나라에서 땅과 녹봉을 주었기 때문에 굳이 공부에 열을 올릴 필요도, 정치력을 갖출 필요도 없었다. 도리어 [[양녕대군]]이나 [[제안대군]]처럼 적당히 사고도 쳐주면서 유유자적하며 노는게 본인이 천수를 누리며 호강하는 데는 매우 도움이 되었고 왕실에서도 역모에 연루되거나, 왕에게 개기거나, '''[[임해군]], [[순화군]]처럼 강력범죄를 수십차례 저지르는 개막장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破職)시킬 것을 건의하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悖慮)하여 [[신하|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기생|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파직(破職)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하니, [[명종(조선)|상(上)]]이 답하기를, >“이초(李岧)가 연소하여 사체(事諦)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교계(敎戒)를 가하여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1552년]]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을해) 2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23_002|#]] 이상한 점은 명종이 오히려 4살이 어린데도 덕흥군을 '어리다'라고 적극 감싸주고 있는 것. 이건 명종이 군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쨌든 다음은 그의 노비들이 장인인 하동 정씨 정세호의 노비들과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사관의 논평이다.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鬪濁)한 죄로 추고(墜告)할 것을 아뢰다 >---- >[[사관(역사)|사신(史臣)]]은 논한다. 덕흥군은 [[전주 이씨|종실]](宗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되지만(후략) >----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1554년]]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경오)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3030_001|#]] 손자들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보다는 덜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조선)|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 선조,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경종(조선)|경종]]의 경우는 개수실록 또는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본 실록 외에 다시 만든 실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당파 정치상 새로운 당이 집권하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시 만들었으므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에 적힌 덕흥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망나니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로울 수 있다. 총명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면 신하들의 눈에 띄기 쉽고, 최악의 경우 역모 사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사고치면서 평판을 나쁘게 해야 신하들의 눈길과 왕의 의심을 피해 천수를 누릴 확률이 높아지므로, 덕흥군의 저런 행위는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당장 앞 세대의 [[제안대군]]만 생각해도 일부러 사고를 쳤다는 썰이 많았다. 다만 제안대군은 덕흥군과 그 후손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쪽은 가족 문제를 일으켰지 그 외의 남에게 피해주지는 않았으니. 300년 후 [[흥선대원군]]도 멍청이 행세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사이에서 살아남아 [[고종(대한제국)|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소설 '운현궁의 봄'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반박도 있으나, 해당 시기에 경원군 이하전이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말했다가 트집잡혀 결국 사사되었음을 생각하면 이하응 또한 어느 정도는 몸을 숙이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