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항해시대 (문단 편집) === [[포르투갈 왕국]]의 경우 === 대항해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무역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해]] 그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냐면 그건 또 아니라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중심지에서 동떨어진 변방'임에도 상업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포르투갈은 인구도 적고 그만큼 국력도 약한 데다가 유럽의 가장 서쪽 변방에 있는 약소국이라서 애초에 유럽 본토에서 벌어지는 패권 쟁탈전에 끼어들 처지도 못 되었다(...)] 때문에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에서 전통귀족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레 해양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히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단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안쪽으로 나아가기가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뿐이었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에 힘입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인들이 흥미를 느꼈다. 이 두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내친 김에 [[인도]]까지 갈 수 있나 가볼까?' 라는 생각에 바스쿠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