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화사전 (문단 편집) === 출판 === 1928년 정식 출판 계약을 한 이후 모로하시는 [[강희자전]]을 비롯한 중국의 전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어휘를 수집하고 원전의 용례를 모아 카드로 작성하기 시작, 1931년에 이르러 이 카드가 40만을 헤아려 출판사가 계획한 한두 권으로 담을 수 없는 양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스즈키는 규모의 확대를 받아들이고 이 사전을 세상에 내는 일이라면 자신의 일생을 걸겠노라고 결의, 사전에 알맞게 정판(整版) 공장을 따로 설치하고, 필요한 활자를 일류 목판 조각사 수십 명을 동원하여 조각하게 하였다. 드디어 1941년 마감 단계에 들어가 표제자와 어휘에 일련 번호를 붙이고 최종적인 교정을 행했는데 이 기간에 조수 4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고 모로하시도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다. 1943년 9월 10일 제1권이 간행되자 그 반향은 엄청나 모로하시에게 아사히문화상이 수여되고 책의 예약 또한 3만 부를 넘었다. 그러나 1945년 2월 25일 [[도쿄 대공습]]으로 조판해놓은 1만 5천 페이지 분의 활자와 어렵게 입수한 용지가 모두 재로 변하는 일이 발생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였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모로하시에게 전권의 교정쇄 3부가 있어서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전 편찬을 재추진하며 스즈키는 사운을 걸고 이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대학 재학 중인 장남과 고등학교 재학 중인 차남을 모두 퇴학시켜 사업에 참여하게 하여 장남은 경영을, 차남은 식자 기술을 익히게 했다. 후에 삼남은 대학 졸업 후 경리업무를 맡게 했다. 또한 목판 인쇄를 위해 사진[[식자]]기연구소의 이시이 모키치(石井 茂吉)를 1년간 설득하여 승낙을 얻었고 이시이 모키치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은 일의 일관성을 위해 표제자를 모두 혼자서 써야 하는 힘든 일을 하루에 20자씩 8년간에 걸쳐 수행하였다. 이 작업 덕분에 1960년에 [[서체]] 개발의 공으로 기쿠치칸(菊池寬)상을 받았다. 마침내 27년의 각고 어린 노력 끝에 1955년 8월 제1권의 인쇄를 마무리했다. 이때까지 이 작업에 종사한 인원이 22만 2682명, 비용 또한 당시 물가로 환산하여 약 6억 엔을 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