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문단 편집) === 제국 선포 ===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게 경복궁을 두번이나 점령당하고 건청궁에 감금당해 감시받던 고종은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얻어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구성한 대신들을 잡아들이고 일본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 중앙과 지방조직의 개편 등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 대신들을 유럽과 북미에 파견시켜 각국의 외교에 힘을 쏟으며 정무를 해나간다. 특히 러시아 공사인 [[카를 베베르]]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교류가 잦아지며 일본을 견제할 힘을 가진 러시아에 매력을 느끼고 국가를 변모시킬 것을 구상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에 힘을 쏟았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 청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위임통치 청원]]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또한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추구했는데,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고,[*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근대 사회의 후발주자인 조선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가 수반되어야 했기에 고종의 황제 즉위가 고려되었다. 반면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황제 즉위를 준비하면서 주변국이 반발할까 고심하기도 했다. 즉위를 준비하면서 고종은 [[환구단]]을 지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은 [[세조(조선)|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시도했다 못한 것이기도 했다.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러시아 장교의 훈련으로 양성한 1천여 명의 호위병력인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를 갖추고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과 매우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그로부터 약 8개월 뒤인 10월 12일 ([[화요일]]) 그동안 구상했던 대한제국을 건국한다. 또한 당일에 [[을미사변]] 이후 국장을 미뤄왔던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로, 왕세자를 [[순종 황제|황태자]]로 책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12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