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문단 편집) === 순종 즉위와 멸망 ===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미국]]과 [[영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통해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해주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1910년이지만 사실상 이 시기에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는데, 해외에서는 보통 보호국을 주권국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통가]], [[브루나이]] 등도 [[영국]]의 보호령에서 벗어난 것을 '[[독립]]'했다고 간주할 정도로 보호령은 사실상의 식민지로 취급받고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Korea_under_Japanese_rule|Korea under Japanese rule]] 문서에서도 일제강점기의 범위를 1905년~1945년으로 잡았으며, [[https://en.wikipedia.org/wiki/Korean_Empire|Korean Empire]] 문서에서도 대한제국이 주권 국가였던 것은 1905년까지라고 보고 그 이후는 일본의 보호령이라고 보고 있다.] [[고종(대한제국)|고종]]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빌헬름 2세는 "한국의 황제께(Kaiser von Korea)"라고 쓴 답장을 써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 냥(500억 상당)을 독일 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독일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 제국|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안됐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이미 눈치를 챈 일본이 손을 써서 특사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옹립했다. 1907년 7월 19일 순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일본은 《[[정미7조약]]》, 《[[기유각서]] , [[한일약정각서]] 등의 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해산|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 등의 국가 권력을 뺏어갔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의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고, 연호 또한 [[1910년|융희 4년]]에서 [[1910년|메이지 43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