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문단 편집) === 국제 반포 === 초기 대한제국의 체제는 고종이나 독립협회나 독일식이냐 영국식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입헌군주제]]가 고려되었다. 하급 관료와 황실 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 제국|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독일 제국|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제국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 제국이 채택하고 있었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 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시위와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보부상들의 지지를 받았다.[*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행정심의회)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지방민들은 여전히 왕을 섬기는 근왕 의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보다는 황국협회의 세력과 지지도가 훨씬 컸다. 또 단순히 독립협회에 반발하는 전근대적 반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독립협회의 실력도 권력을 인수하기엔 부족했다.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 내 여론을 등에 업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 고종이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양 내 독립협회 지지층이 아니라, 정동에 있던 외국 공사관들이었다.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서양 공사관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립협회의 해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행정심의회)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고종의 반발을 사는 독립협회 임원들의 무리한 행동으로 해산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중추원이 가지게 되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명성황후 암살 모의 사건[* [[을미사변]] 이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이다.]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박영효]]나 국외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 당시 박영효는 반란 시도를 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귀화한 다음 [[독립문]]과 관련해서 귀국했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사고를 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한국(조선) 국적도 포기했다.]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 특히 박영효를 쓴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박영효는 이 시점에서도 조선 내부와의 연결과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즉 박영효를 추천한 사람은 외환죄로 취급된 것.]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해산시켰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급진적이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었다.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