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성공회 (문단 편집) === 한국인 주교 서품 이후(1965~현재) === 대한성공회는 한국 성공회의 자립과 관구 독립을 원칙으로 삼은 존 데일리 주교의 사목적 방침 하에서 본국의 잉글랜드성공회, 미국성공회, 캐나다성공회 등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선교 발전의 결실로 1965년 이천환(바우로[* 성공회에서 세례명은 [[공동번역성서]]에 따르지만 예외적으로 바울로(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명)은 흔히 그냥 '바우로' 라고 불린다. ex)[[김근상|김근상(바우로)]].]) 사제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또한 이때까지 대한성공회는 전국을 통틀어 단일교구 체제였지만[* 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한국교구] [[서울교구]]와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대전교구]]가 분리됨으로서 2개 교구 체제가 되었고, 성공회 한국교구의 마지막 주교인 존 데일리 주교가 신생 교구인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대전교구]]의 초대 주교를 역임했다. 대한성공회는 잉글랜드성공회 USPG의 앵글로-가톨릭 성향 선교사들의 선교로 인해 1970년대까지 매우 강한 앵글로-가톨릭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존 데일리 주교는 CMS(Church Mission Society) 등 복음주의적 선교단체 뿐만 아니라 미국성공회 및 캐나다성공회 등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초빙하고, 여러 한국인 신학생들을 미국이나 호주 등 다양한 국가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저변을 넓혔다. 대한성공회의 유명한 사제인 대천덕 신부도 이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성 미가엘 신학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천환]] 주교는 재임 시 한국의 [[에큐메니즘]] 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1965년 [[한국 천주교]]와의 기도모임, [[개신교]] 교단들과의 [[부활절]] 연합예배 참여, [[루터교]]와의 [[축구]]모임 등 기독교 세계 분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성공회가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천환]] 주교의 관심과 노력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천환]] 주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성공회·천주교 재(再)일치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출처 - https://veritas.kr/news/6927?tag=redirect_sub_re] 대한성공회는 [[이천환]] 주교 재임기에 [[에큐메니즘]]의 일환으로 앵글로-가톨릭 일색이었던 법규와 전례를 개정하고, 타 교파 교인들에게 영성체를 베풀기 시작했다. 1974년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대전교구]]에서 [[대한성공회 부산교구|부산교구]]가 분리되어 3개 [[교구]]가 성립되었다. 이로서 대한성공회는 '[[성공회 한국관구|한국관구]]'가 성립되는 조건을 갖춘다.[* [[성공회]]에서는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교구]]가 3개 이상이어야 한 [[관구]]로 독립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성공회의 관구 성립은 이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에 이루어졌다. 또한 [[대한성공회 부산교구|부산교구]]는 교구 설정 당시 교회 6개에 성직자 8명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고, 현재도 일부 교회에 사제가 없는 등 교세 및 재정에서 열악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편 1974년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대전교구]] 2대 주교였던 리처드 럿트가 영국으로 귀국하고, 1977년 마지막 선교사였던 부산교구의 앨런 매솜(Alan Messom, 한국 이름 맹범식)이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선교사 시대는 선교 87년 만에 막을 내렸다. 대한성공회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빈민선교 및 산업선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존 데일리 주교는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구제사업과 선교사업을 하며 한국에서 산업선교의 시초를 닦았고, 한국 도시산업선교의 출발점인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도 미국성공회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사회복지기관인 성공회 나눔의 집과 나눔의 집 교회(나눔교회)는 1980년대 중반부터 빈민선교의 일환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다. 또한 1970년대부터 부산에서 선원선교사업을 벌였고, 현재도 부산교구에 선원선교센터를 운영한다.[* 애초에 성공회는 선원선교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 교단으로, 1856년에 영국성공회에서 세운 The Mission to Seafarers(별칭 플라잉엔젤)가 그 기원이다.] 성 미가엘 신학원은 1982년 4년제 천신(天神)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성공회신학교로 개명하고, 1992년 정식 고등교육기관인 성공회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가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의 [[성공회대학교]]에 이른다. 1974년 지적장애 아동 및 청소년들을 위한 성 베드로 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종교재단 소속으로는 처음 세워진 장애인 [[특수학교]]였다. 성 베드로 학교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바로 옆에 있다. 1970년대 후반 대한성공회에서는 빈민선교 및 산업선교의 영향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제 및 신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교회 내에도 교회갱신운동이나 청년신자운동 등 진보적인 목소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혁 덕분인지 1987년 6월 10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서울주교좌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날 오후 6시 삼종 기도 시간을 알리는 서울주교좌성당의 종소리로 [[6.10 항쟁]]이 시작되었다. 서울대성당은 공식적으로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이다. 1993년 정식으로 한국관구(Province)가 성립되었다. 한국관구로 독립하기 전에는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었기에, 대한성공회는 교회법 개정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최후 승인을 필요로 했다. 물론 지금은 대한성공회가 독립적인 관구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법 개정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 절차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원래 [[서울주교좌성당]]은 건설 당시 재정난으로 설계도안과 달리 축소 완공된 상태였는데,[* 좌,우측 익랑이 짧고, 짧은 신랑으로 이루어진 일자형]1992년 원래 설계도안이 영국에서 발견되어 이를 바탕으로 원안대로 성당을 완공시키는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1996년에 확장 완공되었다. 2004년 현행 [[성공회 기도서]]가 마련되었다. 대한성공회는 1965년 공도문 출간 후 여러 시험 및 의안 공도문을 제외하면 정식 후속 공도문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2004년 그동안의 신학적 연구와 고찰을 종합하여 완성된 기도서를 내놓은 것이다. 2004년 성공회 기도서는 현재까지 미미한 개정[* 2018년판 기도서]을 거쳐 대한성공회 각 교회의 [[감사성찬례]]에서 사용되고 있다. 2012년 [[천주교]]·[[재림교회]]에 이어 성직자 납세를 하는 3번째 교단이 되었다.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943686|관련 기사]] 2021년 현재 대한성공회 의장주교는 [[이경호(성직자)|이경호]] 베드로 주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