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역사 (문단 편집) === [[4.19 혁명]]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 [[대한민국 제4공화국]]과 [[경제계획(대한민국)|경제계획]]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0007832_11042133.jpg|width=100%]]}}} || || '''4.19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마산용마고등학교|{{{#fff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f0020275_4af1dccb50a05.jpg|width=100%]]}}} || || '''시위에 참여하는 서울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br]__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__[br]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19혁명시위대하고계엄군.jpg|width=100%]]}}} || || '''[[4.19 혁명]] 당시 서울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합세한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16.egloos.com/f0020275_4b002cb180049.jpg|width=100%]]}}} || || '''시민들의 환호와 야유속에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 [[이승만]] 정권은 개헌을 반복하며 집권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후 하와이로 망명[*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하게 되고 [[장면]]을 행정부 수반 총리, [[윤보선]]을 군통수권자 대통령으로 4.19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2공화국은 대통령과 총리간의 알력이 심했고 같은 정당 내에서 계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10개월 만에 개각을 세번이나 단행하는 등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4.19의 여파로 정치 및 언론자유가 대폭 신장되는 긍정적인 변화는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5.16 군사정변]]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16 셔먼전차.jpg|width=100%]]}}} || || '''[[5.16 군사정변|{{{#fff 5.16 군사정변}}}]] 당시 서울을 장악한 쿠데타군의 M4A3E8 셔먼 전차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새마을기.svg|width=100%]]}}} || || '''새마을운동의 깃발''' || 이때는 [[제국주의]]를 야기한 선진 열강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차이를 떠나 [[종속이론]]에 입각해 항구를 봉쇄해 원료부터 제품생산까지 자립공업을 일으키고 국영기업을 육성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시기였는데 이전의 실패에 교훈을 얻어 [[1964년]]에 이전까지 하던 계획을 뜯어고치는 당시 후진국의 대세와 정반대인 약한 산업은 관세와 정부의 보조금으로 충당해주고 일정한 단계가 달성되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수출주도 산업화로 방향을 틀었다. 3년간의 군정을 통해 정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받아서 선거를 준비하였고 상대의 종북몰이를 역으로 이용, 전라도와 경상도 농민들의 표를 받아 마침내 1963년 12월 국민 선거를 통해 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일차관기업의 부실화와 자금문제는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수교]]에 의한 물품과 기술의 유무상 공급, 고강도 노동 및 월남전 참전 특수에 따라 경제 규모는 성공적으로 커졌고 노동집약형 경공업과 조선, 자동차 등 노동집약형 중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시기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참고. 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투입해 국력이 소모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한데 이어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6.25 전쟁]]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중관계]]는 해빙기를 맞았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데탕트]]로 불린다. 이에 비해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경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월남 특수 종료와 함께 미국발 불황이 국내에 찾아와 경제성장률이 급락하고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8.3 사채 동결 조치]] 등을 실시하는 한편, 북한의 무장공비에 의한 군인 및 민간인살해가 번번한 것을이유로 들어 [[1971년]]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 52%의 득표로 7대 대통령에 취임해 1972년 10월 17일 19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중지시키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며 효력이 정지된 조항은 "비상국무회의"가 주재하고 [[10월 27일]]까지 개헌안을 마련하여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10.17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제3차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4공화국]]의 성립이었다. 1972년 들어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경공업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옷]], [[합판]], [[신발]], [[가발]] 등의 품목들이었는데 이 같은 수익이 별로 남지 않는 품목들로서는 성장 동력의 전망이 분명치 않았다. 이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당시 경제담당 수석 비서관에게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원철은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었다고 대답하했다. 이에 박정희는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6월에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해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해, 1981년까지 전체 공업비중에서 중공업비중을 51%로 늘리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하였다. [[주철]], [[강철]], [[기계]], [[조선업]], [[화학]]은 [[산업혁명]]이래 선진국이 독점해온 산업들로서 막대한 자본 투입과 수많은 기술인력 양성이 필요해[*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단계가 필요한 만큼 최소한 인구는 7000만 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스페인]]도 진출하지 못하던 분야이고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무한정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다 파국을 초래]]한 분야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모험적인 투자로서 자칫하면 한국경제는 대대손손 빚더미에 오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것에 과감히 도전하였으며, 1974년 원유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한 [[오일 쇼크]]가 발생해 물가상승률이 8배 이상 치솟고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해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고 연간 수출증가율은 40%를 경신하는 동시에 노동집약 건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내며 농촌발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도시보다 현저하게 뒤쳐진 농촌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가구당 소득이 도시를 역전하였다. 이를 오늘날 해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찾아 배우러오며, [[UN]]에서도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정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970년대에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매우 가난한 농업 후진국에서 15여년만에 공업이 발달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안정적인 장기집권을 실현하였다고 평가받는 유신 체제는 곧 각종 반발로 강하게 이어졌으며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들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YH 사건 등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된 와중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하는데, 이를 [[10.26 사건]]이라 한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참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hnh.jpg|width=100%]]}}} || || '''반란 성공 후 12월 14일에 사진을 찍은 [[하나회|{{{#fff 하나회}}}]] 조직원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12쿠데타군1.jpg|width=100%]]}}} || || '''서울로 진격하는 반란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kor.gif|width=100%]]}}} || || '''반란군으로부터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다 전사한 [[김오랑|{{{#fff 김오랑}}}]] 중령''' || 10.26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 임명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 기록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군 내 정보를 독점 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전두환을 보직해임 시키려 했으나 전두환은 자신의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인맥으로 이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정승화를 불법체포하며 [[12.12 군사반란]]이 발생한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당시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의 우유부단한 대처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배신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결국 실패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갑종장교, 육사 8 ~ 10기 중심의 기존 군부는 몰락하고 하나회와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탄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