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역사 (문단 편집) === [[3.1 운동|독립 선언]]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수립 === [include(틀:다른 뜻1, other1=3.1운동, rd1=3.1운동)]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정치인)|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 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 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북한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64767_81190_2723.jpg|width=100%]]}}} || ||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1921년|3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 사진''' ||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 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 대통령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