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매일신보 (문단 편집) == 쇠퇴와 인수 ==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대한매일신보》였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게 된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사주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양기탁은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핵심 인사 두 명의 이탈로 《대한매일신보》는 큰 타격을 받았다. 재판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일제는 [[영국 정부]]를 직접 압박해 베델을 [[상하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형을 받게 만들었고, 1909년 5월 베델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08년 5월 발행인이 영국인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으로 교체되었고 1910년 6월에는 이장훈으로 다시 바뀌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 인수되었고, 제호에서 '대한'이 떨어진 채 1910년 8월 30일자 신문부터 총독부의 조선어판 기관지로 전락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의 역사는 [[매일신보]], [[서울신문]]을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