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매일신보 (문단 편집) == 활동 == 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제국|일본]],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으나,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발, 반일 신문으로 전향했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일화가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인 [[어니스트 베델|베델]]이 [[영일동맹|일본과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기탁.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aekam.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재신채호.jpg|width=100%]]}}} || ||<-3> {{{#fff ''' 《대한매일신보》의 주요 논설진. 왼쪽부터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 치외법권 혜택을 받아 통감부의 검열을 일체 받지 않고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을 비판하는 논설을 자유롭게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주요 논설진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아주 쟁쟁한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 운동을 주도했으며, 1907년(광무 11년) 4월에는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했다. 이 신문은 항일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 논조를 견지했다. 한국 민중들의 민족 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으며,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부당성, 그 외의 일제의 야만적 침략 행위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이 신문지상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알려졌을 때는 사옥에 큼지막한 태극기를 내걸고 축배를 들며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기도 했다고. 이에 대한 활동 중에 〈[[시일야방성대곡]]〉 관련 칼럼 보도 및 〈시일야방성대곡〉의 영문판 번역을 '''게재'''했다. [[2017 수능]] 한국사 복수 정답으로 알려진 일(...)[* 수능 출제 전까지 《[[황성신문]]》에만 게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대 중요한 사건이 한 신문에만 보도가 되기보단 타 신문에도 보도가 되기에 출제 오류를 범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