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 (문단 편집) ===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 출제범위와 각 교시별 영역은 97학년도 수능과 동일하다. 1998 수능은 그 이전의 수능들에 비해 수준이 상당히 낮아졌다. 일단 총점 1등급 컷에 해당하는(당시에는 등급제가 없었다. 등급제는 한참 뒤에 도입된다.) 상위 4% 점수가 인문계 338점, 자연계 343점으로 전년도에 비해 50점 이상 치솟았다. 수험생들은 1년전 수능에 맞춰진 모의고사에 1년간 익숙했던지라 자신의 점수가 급등해서 딱 하루 기분이 좋았다가 다음날 학교 가서 남들도 다 그만큼 오른 것 보고 급좌절.[* 더구나 1998학년도 수능 시험 실시일 '''이틀 뒤'''에 우리나라가 '''[[IMF 사태]]'''를 맞게 되어 사회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년도의 97년 수능이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수능처럼 보일 뿐, 이후의 6차(99년~04년) 수능들과 비교하면 98년 수능도 어려운 쪽에 속하는 수능이다. 실제로 당시 언론 보도 등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점수 인플레로 진학지도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떠들어 댔지만, 현재 수능이 저런 수준으로 출제된다면 오히려 엄청난 불수능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실제로 원점수 390을 넘은 수험생은 전국에 30명이었다. 게다가 1998학년도부터 2001학년도까지가 [[베이비붐]] 세대로 재학생수가 지나치게 많아져서 [[수험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도 있다. 한편 이 해부터 [[수시]]모집이 시행되는데, 수시 모집에서는 수능 성적을 그다지 많이 고려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의 경우 수시모집 예비 합격생은 [[최저학력기준|수능 성적이 상위 10% 안에만 들면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1997년 [[12월 2일]]에 서울대학교 사상 최초의 수시모집 예비 합격생 348명[* 한 학과당 1~5명. 예컨대 인문대학 소속 학과들은 대부분 1명이었고(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는 2명) 법학부가 5명이었다.]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이 가운데 330명이 최종 합격을 하였다.[* 여기에서 떨어진 18명은 수능 성적이 상위 10% 안에 들지 못해 최저학력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1998년]] 2월을 기점으로 여야 [[정권]]이 교체되면서 [[진보]]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1998년 수능 시험의 수준 하락 추세는 그대로 수년간 이어져 진보 정권이 주관한 첫 시험인 [[1999년]] 수능, [[2000년]] 수능, [[2001년]] 수능까지 지속적으로 수준은 하락세였다. 1998학년도 수능을 마지막으로 6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