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 (문단 편집) === 1994학년도 수학능력시험 (1993년 8월 20일, 11월 16일) === ||<-5> '''[[대학수학능력시험|{{{#000000,#e5e5e5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 || {{{#8c8c8c 도입}}} || {{{#d0d0d0 {{{+1 →}}}}}} || '''{{{+1 1994 수능}}}'''[br]{{{#8c8c8c 1차 (1993.8.20.)[br]2차 (1993.11.16.)}}} || {{{#d0d0d0 {{{+1 →}}}}}} || [[대학수학능력시험/역사#s-3.2|{{{#8c8c8c 1995 수능}}}]] || 최초의 수능이었던 1994학년도 수능(대부분의 1975년생과 빠른 1976년생들이 응시)은 대학별고사(본고사) 이전에 학생의 실력을 1차로 평가하는 [[예비고사]]의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정부의 유도 및 준비 부족 등의 이유로 대학별고사를 포기'''하였고, 결국은 애초에 대학별고사를 치르려던 40개 학교 가운데 '''단 9개 대학교'''(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포항공대, 수원가톨릭대, 한성대)만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대비 문제집을 판매한 출판사만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후 대학별고사를 보는 곳만이 상위권 대학교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이듬해에는 좀더 많은 학교에서 본고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8월과 11월에 수능시험을 각각 치러서 둘 중 나은 점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8월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은 상위권 학생들은 9월부터는 더 이상 수능에 신경쓰지 않고 본고사 대비에 집중하였고,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11월 수능은 8월 수능에 비해 훨씬 어렵게 나오면서 8월 수능에 비해 더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카더라]].] 참고로 이때의 입시 전형으로는 내신+수능(+본고사)의 '''정시전형'''(1월 이후)[* 정시전형도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졌다.]과, 정시 이전에 내신+수능으로만 학생을 뽑는 '''특차전형'''(12월)이 있었다. (당시에는 수시전형이 없었다.) 특차전형의 응시가능 기준 컷(보통 백분위 점수를 이용)은 상당히 높았으며, 특차전형 합격자는 정시 응시가 불가능하였다.[* 서울대에 원서를 낼만한 성적을 받은 '''우수학생'''을 연고대에서 '''선점'''하기 위한 전형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당시 서울대는 특차전형을 통한 학생 선발이 없었다. 8월의 1차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고 특차전형 응시를 결정한 학생들은 9월부터 입시공부에서 사실상 해방되었다. 이 경우엔 자그마치 '''한 학기'''를 놀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학교는 갔겠지만 공부는 안 했겠지 하지만 내신이 있으니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특차전형에 합격하면 서울대 응시는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서울대 원서를 낼 수 있는 점수를 받고도 그 기회를 걷어차는 경우가 있었을까?''' 어쩌면 연고대 특차전형 응시자들 중 "아 몰라 공부하기 싫어 귀찮아 나 서울대 안 가." 하는 '''서울대 무시하는 시크한 수험생'''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또한 위와는 별개로, 수준이 확 올라간 2차 수능 이후 대학별고사 준비에 부담감을 느끼며 특차 지원 쪽으로 돌아선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1차 수능 점수가 아쉬웠던 학생들 가운데 어렵게 나온 2차 수능에서 성적을 만회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대학별고사 준비에 매진한 학생들도 많았다.] 초중고 12년 공부가 한 날 한 시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에 따라 시행된 제도였으나, 난이도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아 2차 수능이 '''훨씬''' 수준이 높았으며,[* 200점 만점의 시험에서, 1~2차 수능에서 받은 점수차가 20점씩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나온 2차 수능에서 오히려 점수가 올라간 학생들도 극소수 있었다.] 표준점수 제도가 없어서[* 원점수와 백분위만 제공했고 대다수 대학들은 원점수를 사용했다.]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5학년도부터는 한 해 1번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하였다. 이로서 94학번은 [[핫팬츠]]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땀을 흘릴 수는 없었던게, 태풍이 와서 추웠다. 그래서, 여름에도 입시 한파라는 말이 나왔다.] 대입시험을 봤던 유일한 세대가 되었다. 또한 이 해 대학입시는 유일하게 화요일(11월 16일), 금요일(8월 20일)에 치렀다. 또한 이 해 수능은 문/이과 계열분리가 없이 공통으로 출제되어 (선택 과목 없이) '''예체능계열을 포함한''' 모든 수험생이 같은 시험문제를 풀었으며, (본고사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몇몇 대학을 제외하면) 대학교 입학도 문/이과 [[교차지원]]이 가능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더 배운 이과 계열 학생들이 유리했다.[* 심화과목을 배운 이과 학생이 문과 수학/과학 문제를 보면 아주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먼 과거 이야기이겠지. 그러니 해당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나무위키 끄고 공부해라.] 지금 기준으로는 당시 시험 범위 교과목이 많은 편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문/이과별 심화과목[* 예를 들면 공통/인문계 국어계열 과목은 국어, 문학, ''문법'', 작문이 있었고, 사회계열 과목은 국민윤리, 국사,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사회문화'', ''세계지리''가 있었다. 이과계 학생의 이수범위는 이 목록의 글씨가 기울어진 교과가 빠진다. 그런데 94학년도 수능에서는 문/이과 공통으로 출제 범위가 정해졌기에, 문과 심화 교과목은 제외되었다. 이과의 경우, 수학과 과학 과목의 출제범위가 절반에서 2/3정도로 줄어들었다.]과 제2외국어, 한문, 실업(상업.공업.농업)/가사, 예체능 과목은 수능 출제 범위가 아니었던 관계로 오히려 기존의 학력고사에 비해 쉬워진 면도 있었다.[* 그래서 본고사에 선택과목이 있는 학교를 노리는 상위권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제2외국어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 외에도 수능에서 배제된 여러 과목들은 내신에서도 무시당했다. 거 수능에도 안 나오는데 적당히 합시다. 대입시험 준비해야지, 이런 과목 기말고사 공부하는데 시간 많이 쓸 필요 없잖아?] 당시 인터넷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배치표조차 없었고, 거기에다가 그 전과 다르게 대학별로 다른 날짜에 정시 전형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면서 복수지원이 가능해진데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같이 가군, 나군 이런 것도 없이 입시 일자만 다르면 원서를 무제한으로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같은 날 시험(면접) 보는 학교에 중복 지원만 금지되었다. 그래서 실제 중하위권 학생의 경우 5~6개 이상 원서를 쓰는 게 기본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3 담임교사들도 죽어나갔다. 요즘 같이 인터넷으로 접수하던 시절도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원서 쓰고 학교장 직인 찍고 사진에 철인 찍고 생활기록부 복사해서 원본대조필 찍고, 거기에 수능 성적표도 원본을 봉투에 넣어 제출했는데 학생이 원서를 많이 쓰는 경우 원본이 몇 장 없으니 성적표 역시 복사하고 원본대조필 교장 직인 찍어서 넣어야 했다. 이런 반복 작업만 학생 한명당 대여섯번씩 해야 된다고 생각해 보자. 거기에 자기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진학 지도까지 하려고 하면...], 94학년도 입시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백분위 점수로는 대략적인 지원가능권 예측 이상은 불가능했다. 결국은 안전 위주의 하향지원과 대담한 상향지원이 난무하였다.] 결국 서울대를 제외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이 다 털렸다.[* 한양대 전자공학과가 미달되었다.] 500점 만점 기준으로 350점대 학생들이 연세대, 고려대에 정시로 합격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성균관대의 경우 서울대, 연고대와 다른 날짜에 전형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서울대, 연고대에 지원한 일부 학생들이 안전하게 성균관대에도 지원을 하게 되면서 성균관대의 경쟁률이 대폭 상승하였다. 그 외에도 서울지역의 경우, 동국대, 한국외대, 세종대, 홍익대 등이 가장 많은 대학들이 전기 정시모집을 하는 날과 다른 날에 전형을 실시하면서 수험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경쟁률이 크게 올라가는 진풍경을 보였다. 그리고 대학은 엄청난 전형료 수입을 올렸다. 특히 1월 12일에 홀로 전형을 한 세종대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높은 경쟁률을 보여 전형료 수입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서울대의 경우 1000점 만점 중 400점이 본고사이다 보니, 최고점 불합격자와 최저점 합격자가 심하면 200점까지 차이나는 등 본고사 점수에 따라 변별이 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23000289118015&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2-30&officeId=00028&pageNo=18&printNo=1774&publishType=00010|93년 신문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