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 (문단 편집) == 역사 ==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편이다. 우선, 흔히 최초의 대학으로 꼽히는 학교는 '''1088년'''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세워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로 볼로냐 대학교가 '[[서유럽]]' 최초의 대학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볼로냐 대학교]]가 정말 '전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는데 그 후보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면 이렇다. * 세계 최초의 '국립학교'이자 처음으로 '대학(University)'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육기관은 '''425년''' [[동로마 제국]]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마그나우라 궁정 대학, Πανδιδακτήριον της Μαγναύρας, Pandidakterion)이다. 그 이전의 교육기관들은 성당 부속이거나 사립 교육기관이었으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고등교육기관]]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립하였고 그곳에서 [[법학]], [[철학]], [[의학]], [[경제학]], [[공학]] 과정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후 제국 내 다른 대도시인 [[아테네]],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도 비슷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들은 동로마 제국의 쇠망과 함께 명맥이 끊겨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그리스]]나 [[동로마 제국]]을 주목하는 쪽에서 이미 없어지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최초의 대학으로 밀어주는 편이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의 자리에 세운 이스탄불 대학교를 판디닥테리온의 명맥을 이었다고 해서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보자는 시각도 있지만, 정통성이 한 번 끊겼기 때문에 논외로 치는 쪽이 주류이다. * '''5~7세기'''에 세워진 인도의 '''날란다 대학'''이 최초라는 설도 있다. 인도의 날란다 대학은 불교학 교육과 [[불교]] [[수도원]] 기능 외에 불교 외 종교, 철학, 문학, 수학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제공하는 한편 날란대 대학의 도서관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논리학, 문학, 점성술, 천문학, 의학 등의 분야까지 풍부한 자료를 구비하여 다르마 간자(Dharmaganja, '진리의 보물'이란 뜻)라고까지 불렸다. 날란다 대학은 이후 없어졌다가 현대에 들어 다시 건립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에 다시 세운 것이기에 밑의 알 카라윈에게 기네스북 타이틀은 빼앗겼다. 주로 [[인도]]나 [[불교]]계에서 이 날란다 대학을 최초의 대학으로 밀어준다. * [[이슬람 제국]] 건설 후 이슬람권 곳곳에 세워진 '''[[마드라사]]'''(مدرسة)라는 이슬람 교육기관들이 최초의 대학이라는 의견도 있다. 제일 대표적인 후보는 '''859년''' [[이드리시 왕조]] 시대에 세워진 [[모로코]]의 '''알 카라윈 대학'''(جامعة القرويين)으로 이쪽은 무려 '''현대까지 모로코 페스에 현존한다'''. 그래서 기네스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학' 타이틀은 볼로냐 대학교를 제치고 알 카라윈이 가져가게 되었다. 실제로 위에서 설명한 동로마 제국의 대학이나 날란다 대학은 역사가 끊기면서 사라져간 반면 알 카라윈을 비롯한 마드라사들은 [[볼로냐 대학교]]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대학들에 영향을 많이 준 편이라 '최초의 대학'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편이다. [[위키피디아]]의 [[https://en.wikipedia.org/wiki/Madrasa#Madrasa_and_university|Madrasa and university]]도 참고해보자. 알 카라윈의 설립자는 파티마 알 피흐리라는 여성과 여동생 마리얌으로 둘은 [[튀니지]]의 거상이었던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 모로코로 이주했는데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자매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여러 교육기관들을 설립하는데에 힘썼고 알 카라윈도 그렇게 세워진 교육기관중 하나였다. 마드라사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교육기관으로서 초기에는 [[이슬람]]에 관한 신학이나 이슬람 법률을 가르쳤지만, 후에는 종교적인 학문 외에도 문법, 약학, 수학, 천문학, 역사, 지리,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고 특히 화학, 물리학 등 과학 교육기관으로도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알 카라윈은 여러 과학자를 비롯해 많은 위인을 배출했는데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인으로는 훗날 기독교로 개종한 탐험가이자 작가 [[레오 아프리카누스]], '''[[교황]](?!)''' [[실베스테르 2세]](945년~1003년, [[https://books.google.co.kr/books?id=n4Eye4ilLVkC&pg=PA93&lpg=PA93&dq=al-Karaouine+sylvester+II&redir_esc=y&hl=ko#v=onepage&q=al-Karaouine%20sylvester%20II&f=false|출처]]) 등이 있다. [* 이상할 건 없는게,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과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간의 학술 교류는 매우 흔해서, 많은 유럽인 학생들이 [[아랍어]]를 공부해서 중동의 마드라사로 유학을 가는 일이 흔했고, 중동권의 학자들도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해 조언을 듣고자 [[동로마 제국]] 출신의 학자들을 초청하곤 했다. 실베스테르 2세의 본명은 제르베르 도리악으로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가 비크의 주교였던 아토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토가 [[레콘키스타]] 전쟁 중 [[후우마이야 왕조]]의 [[코르도바]]에 사절로 보내지면서 코르도바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슬람 궁전과 과학,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슬람 군주들에게 매료되었고 본인 역시 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실제로 실베스테르 2세는 그리스-로마와 아랍의 수학과 천문학을 장려하고, 서유럽에 주판과 혼천의같은 도구들은 물론 아라비아 숫자, 십진법을 도입하는등 역대 교황중 유럽의 과학 및 수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교황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사족으로 알 카라윈을 비롯한 마드라사들은 '''여성에게 최초로 문을 연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다만 여성이 정식 학생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불린 [[https://en.wikipedia.org/wiki/Fakhr-un-Nisa|파크르 운 니사]]등의 여성학자가 간간히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대학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 [[학문]]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고등교육기관은 중세 이탈리아 이전, [[고대 로마]]나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고 동양에서도 [[국학]]과 국자감, [[성균관]] 등 대학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교육기관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학'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볼로냐 대학교(1088년), 알 카라윈 대학(85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425년), 날란다 대학(5~7세기경) 모두가 '세계 최초의 대학'의 후보이다. 그러나 알 카라윈 정도를 제외한 다른 고·중세 대학들은 현재까지 내려오지 않고, 학과, 박사학위를 비롯한 현재의 대학문화를 확립하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대학의 개념을 정리했으며, 대학을 뜻하는 영어 Univeristy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Universitas가 처음 포함된 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볼로냐 대학교'''다. 정리하자면, 대학과 유사한 교육기관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지만 그중 현재까지 내려오는 '대학'의 개념을 규정하고 원류가 된 것은 볼로냐 대학교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대학인 것이다. 특히 대학의 정체성을 '정치권력과 교계로부터 독립된 제3지대'인 이른바 리버럴아츠 칼리지로 인식한다면, '''대학은 전형적인 서유럽적 현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개념은 서구 바깥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물론 우리의 강좌 범위 내에서는 대학교라는 현상의 모든 특성 가운데서 골자만이라도 설명한다거나 대학교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몇 가지 중요한 점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 >첫째는 체제로 본 대학교다{{{-2 {{{[}}}1208년~1209년의 교황 칙서[* (책 속 주석)Seppelt, 『Kampf der Bettelorden』, I, 208 참조]에서 최초로 명명되기 시작하는 'universitas'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일종의 사회학적 의미를 지니다가 곧 정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회학적으로는 연합, 일치, 조합, 총체, 가르치는 이들과 학생들을 위한 정당한 공적 체제를 의미한다. 둘째의 정신적 의미 역시 매우 일찍이 그 힘을 발휘하게 되며, 학문의 종합(universitas litterarum)·전체성·학문을 두루 포함하는 총체성을 뜻하며, 무엇보다도 신학·철학(교양)·법률학·의학의 네 학부의 종합을 의미한다{{{]}}}}}}. '''이렇게 대학교를 하나의 체제로 이해한다면, 어떤 위계질서에도 속하지 않는 기관이 바로 대학교다.'''[* (책 속 주석)Marie-Dominique Chenu, 『Introduction à l'étude de St. Thomas d'Aquin』, 18f]대학교는 [[미션스쿨|사실 교회 측의 전권을 부여받은 기관]]이다. 물론 교황은 위임자를 통하여 강한 영향력을 대학교 내에 발휘하였으며, 이는 특히 [[파리 대학교]]의 경우에 더욱 심했다{{{-2 (이를 간섭이나 섭정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대학교는 교황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책 속 주석)같은 책, 17] 물론 특정 지역이나 지방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대학의 독립성이란 다름 아닌 교황의 특권에서 비롯한다)}}}. '''그렇지만 대학교는 어떤 추기경좌 성전이나 수도원처럼 교회의 위계 조직에 종속시킬 수 있는 단순한 교회 기관도 아니다. 대학은 서양 역사에서도 새로운 어떤 것이며, 서양 문화 특유의 어떤 것으로 남을 것이요, 서양 그리스도교 특유의 어떤 것으로 표기될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교, 즉 동방교회는 이러한 대학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즉 신학부의 석사들(magistri) 전체로 이루어진 어떤 체제가 존재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관한 일이라면 교회의 위계질서 안에 어떤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매우 구체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동방교회는 애초부터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학교란 처음부터 갈등의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체제였다. 그러나 대학교란 이미 서양 정신을 특성으로 표출하는 스콜라 철학의 출범 속에 숨겨져 있던 폭발성을 지닌 것이다. 그 밖에도 이러한 석사들의 권위는 대학교라는 말이 엄격한 의미로 쓰여지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왕이던 헨리 2세는 영국 켄터베리의 교구장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주교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자, 자신이 분쟁을 파리의 석사들에게 제시해 보자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파리 대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기 이전인 1169년의 일이다. > >둘째로, 중세의 대학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한 기구의 일종이며, 정상적인 경우라면 실질적으로 서양에 국한된 것이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교 문화 전체에 개방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며, 더구나 오늘날의 대학교와 비교할 때는 더욱 그렇다. [[옥스퍼드 대학교]], [[볼로냐 대학교]], [[파리 대학교]], 툴루즈 대학교, 쾰른 대학교, 나폴리 대학교 등 어디서 가르치고 배우든 간에, 언제나 그 사람은 아무런 언어나 소통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도 서양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공간 안에 머물러 있다. 이는 물론 서양의 정치나 사회적 질서와 결합되어 있는 단순한 요소는 아니다. > >셋째로, 중세의 대학교는 도시생활의 유행과 함께한다. 이 또한 단순한 사회적 현실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정신적 생동성의 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세뉘는 안셀무스의 제자들이 아벨라르두스의 제자로 바뀌어 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 속 주석)같은 책, 15.] 안셀무스의 제자들은 비록 단 하나의 논지도 성서에 의존하지 않는 한 권의 신론(神論)을 자신들을 위하여 저술해 줄 것을 그들의 장상인 안셀무스에게 간청했지만, 그 학생들이란 수도원 소유지에 건립되어 있는 르 벡(Le Bec) 수도원학교에서 배출하는 하급생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만의 외딴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이었다. 이런 학생들에 비교하면 아벨라르두스의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회적 유형에 속한다. 그들은 {{{-2 (말하자면 당시의 유행가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를 노래할 줄도 아는 가수이자, 이 대학교에서 저 대학교로 유랑하면서 동료를 끌어 모으기도 하고, 도시의 시민들이나 심지어는 교수들에게까지 반항을 일삼기도 하는)}}} 철새와도 같은 부류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도시적 특색이며, 이런 특색은 특히 봉건 지주들로부터 벗어난 해방감과 새로운 자유로 이루어져 있다. 13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하는, 모든 철학과 신학 영역의 저술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도원이나 수도원학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기존의 수도원들이 여전히 존립하고 있었고, 물론 거기서도 대작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때부터 모든 학술적 문헌은 대학교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원들이 당대의 수준에 필적하는 연구서를 펴내고자 하면, 산골짜기에 묻혀 있는 수도원 회랑을 떠나 도시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책 속 주석)같은 책, 16] 토마스가 파리에 도착하던 바로 그해에, 시토 수도원 역시 수사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를 파리에다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베네딕도 수도원도 곧 뒤따라 파리에 학교를 세운다. 탁발수도승들이 더 일찍이 대학교에 몸담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와는 다른, 직접적 요인들과 결부되어 있다. 즉, 새로 생긴 수도회들은 설교가들의 공동체로서, 오직 도시생활만을 원했으며, 도시 밖에서는 생활해 나갈 수도 없었다(산골짜기에서 구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구걸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단순한 현실이 대도시로 진출하게 하는 길을 열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중세 대학교의 특징이라면, 교회의 위계질서와 나름대로 팽창해 나가던 사회 사이의 중립적 지위, 서양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한 유일한 교육 기구라는 특성 그리고 도시 문화에 의한 부상이라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전부다.''' >---- >-Josef Pieper 씀, 신창석 옮김, 『토마스 아퀴나스』 100-104쪽 >이 시대에 신학의 연구와 학문의 중심지는 오직 새로 설럽된 대학들이었다. 1200년경 파리의 여러 학교 교사들이 "교사단"(universitas magistrorum)이라는 고유한 단체로 결합하였고, 그것은 곧 독립된 존재로 교회와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 그레고리오 9세는 1231년에 이 단체를 주교로부터도 독립시키고, 많은 특전을 부여하였다. 이 무렵 볼로냐에서도 또한 그러한 "단체"(universitas)가 발생하였는데, 그러나 여기에서는 학생들이 결합의 주요 대표자들이었다.(학생단. universitas scholariun). 다음 시대에 그러한 결합체들이 많은 곳에서 생겨났다. 그것들은 간단히 "대학"으로 불렸다. ... "학문의 어머니"인 파리는 최대의 명성을 누리고 가장 많은 학생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 '''사람들은 성권(sacerdotium) 및 왕권(Imperium)과 나란히 학문을 독립된 제3의 "세계적 직권"으로 평가하였다.''' 쾰른의 참사회원인 로에스의 알렉산데르는 1284년에 재치가 많은 은유시 「파보」(pavo)에서, 이탈리아인에게는 성권을, 독일인에게는 왕권을, 프랑스인에게는 학문을 서구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각기의 특별한 사명으로 돌렸다. '''이러한 대학 중 하나에서 박사학위의 수여는 귀족과 동등의 지위를 의미하였다. 학문이 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Roland Fröhlich. 《세계 교회사》. 최석우 옮 김. 244-245쪽 [[볼로냐 대학교]]는 1088년 개설 초기엔 신학, 법학, 의학 3개의 학부밖에 없었다. 다만 시대가 지나면서 '[[3학4과|자유7과]]'라고 불리는 7개 학부가 보편적으로 정착된다. 3학 4과는 각각 [[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이다. 자유7과의 확립 이후 본래 있던 3학부는 철학과 더불어 자유7과를 배우고 나서 이들을 심화해서 배우는 과목으로 변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Mediaeval_universities.jpg|width=100%]]}}} || || 중세 유럽의 대학 || 중세 대학에서 수여하는 학위는 이수의 정도에 따라 '바칼로레우스(baccalaureus)', '마지스터(magister)', '리첸티아 도첸디(licentia docendi, 후일 doctor, '독토르'로 간략화됨)'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 현대의 [[학사]](bachelor's degree), [[석사]](master's degree), 그리고 [[박사]](doctor's degree)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 리첸티아 도첸디는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란 뜻인데, 따라서 이것을 따면 이론적으로는 그때부터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중세 대학의 학위들은 관습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얻은 학위인지 명시해 주었다. 이에 따라 모든 과목을 이수한 학생에게 [[신학]]과는 Theologiae Doctor (Th.D.), [[법학]]과는 Jurisprudentiae Doctor (J.D.), [[의학]]과는 Medicinae Doctor (M.D.), 그리고 [[철학]]과는 Philosophiae Doctor (Ph.D.)를 수여하게 된다. 여기서 의학과 학위의 Doctor인 Doctor Medicinae를 줄여서 [[의사]] 선생님을 영어로 Doctor라 부른다. 사족으로 라틴어는 이론적으로는 격변화를 하기 때문에 단어 순서가 의미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단어 순서에 따라 뉘앙스가 살짝 다른데, Doctor가 뒤에 간 형태는 학위의 레벨(Doctor)을 강조하는 의미, 앞에 가면 과목을 강조하는 의미다. 선배격인 3분야는 현대로 와서도 그대로이지만, 정작 제일 늦게 추가된 철학과는 [[과학혁명]]을 거치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수많은 과목들로 분화되어 나중에는 아예 Ph.D. 뒤에 따로 전공을 명시해주는 수준까지 왔다. 이 경우 Ph.D. in [[화학|Chemistry]] 등과 같이 전치사 in을 사용한다. 사족으로 중세 4학부의 맏이인 신학부와 막내인 [[철학]]부(현대에는 신학을 제외한 모든 인문, 사회, 과학 학문 분야 전체를 포괄)는 현대에도 전문직이라기보다는 학자의 양성에 가깝기 때문에 그 형식을 상당부분 유지해서 아직도 학사, 석사, 박사를 차례로 이수하고 수료하는 체계지만, 법학부와 의학부는 철학부나 신학부에 비해 짧은 기간, 즉 학사 학위 정도의 기간보다 살짝 긴 기간에 전문직으로서의 교육을 모두 마치면 J.D.나 M.D.를 수여한다. 한국 많은 [[의대]]에서 하는 "의사는 박사랑 동급으로 쳐 준다"는 이야기는 현대에는 인턴을 석사로 쳐주고, [[레지던트]]를 박사로 쳐 준다고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있지만 사실 중세 대학의 4학부로부터 기원하는 유서 깊은(!) 인식으로, 전통이 잘 전해 내려오는 [[유럽]] 쪽에서는 의대나 [[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은 프로필에 M.D.나 J.D.가 반드시 들어가며, 이는 Ph.D.나 Th.D.와 의전, 의례상 동등한 위상으로 취급해 주는 것이다. 만약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진학해 Ph.D.를 땄다면 둘을 병렬해서 M.D. Ph.D.로 적는다. 물론 현재는 의사도 학업을 지속하면 [[약학]]이나 [[생리학]] 등의 분야에서 Ph.D.를 따는 경우가 있다. 영어단어 '''University'''의 어원은 라틴어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교사와 학자의 공동체)란 라틴어에서 나왔다. 대학이 최초로 탄생한 이유는 종교, 정확히는 [[가톨릭]]의 [[사제(성직자)|사제]] 양성을 위해서였다. 먼저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학위들 중 최종단계에 해당하는 licentia docendi는 본디 가톨릭에서 사제 교육을 모두 수료하고 추가로 배움을 계속하여 다른 사제들을 양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제들에게 수여하는 면허다. 이 뜻을 직역하면 '교육 면허'쯤 된다. 사제를 양성할 교육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 기관이 필요했으므로 그런 기관을 설립한 것이 바로 최초의 대학이며, 이 형태의 교육기관이 바로 현대 대학의 직접적인 조상 되시겠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했던 학부는 신학부였다. 법학부와 의학부는 중세 사회 전반을 지배하며 사회의 유지에도 책임을 지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사회에 꼭 필요한 전문직들을 사제들과 함께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 합류시킨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licentia docendi를 수여할 권한을 위임받은 대학들은 의학과 법학부의 학생들에게도 같은 학위를 수여하였으며 대학은 차츰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나중에는 철학부도 여기에 추가되게 된다.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신학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일대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이 생기면서 철학을 교육할 필요성도 가톨릭 세계 내에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대학으로 최초로 인정받는 곳은 바로 [[볼로냐 대학교]]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의 의미는 '[[신학]]>[[철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중세 유럽 사회의 시녀들은 [[귀족]] 여성들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존재들이며, 때문에 이들도 자신이 섬기는 사람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의 신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왕의 X싼 거 치우는 것도 [[귀족]]만 할 수 있던 시대에 시녀도 하급 신분인 사람들이 채용될 리는 없었고, 그래서 이 당시의 시녀들은 주로 귀족이나 평민 부유층의 여식들이 일종의 [[신부수업]] 차 임시로 고용되어 일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은 곧 '[[신학]]을 이론적으로 지탱해주고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는 뜻이다.] 이때 대학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이로 인해 일반인과의 거리는 멀어지게 되고 상아탑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 전 유럽의 대학이 다 그랬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볼로냐 대학교]]에 가서 문제없이 공부하고 대화할 수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였다. 물론 라틴어를 안 쓰면 벌을 주었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의 공식 언어이자 그 문화와 지식의 명맥을 잇는 교회의 공식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틴어만 할 수 있어도 성서부터 로마 시대 고문서, 로마가 지배했던 유럽 지역의 문서들을 다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문]]과 같은 개념이다. 한문을 쓸 수 있으면 번체자를 배운 중국이나 일본의 고급 지식인들과 대만까지 소통이 가능한 것과 같은 원리. 혹은 [[이공계]] 계통에서 알음알음 늘어가는 [[영어 강의]]를 연상해도 좋다. 캠퍼스 안에서는 쓰는 용어도 영어, 강의도 영어, 질문도 영어, 교과서도 영어, 과제 리포트도 영어, 시험도 영어라서 한국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도 큰 위화감이 없다. >중세 대학의 학생들은 대개 14~15세 때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전에 감독학교나 수도원에서 7, 8세 때부터 3학 4과, 즉 문법, 수학, 음학,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에는 법학(교회법과 민법), 의학, 신학의 세 분야가 있었고 이 대학원 졸업생들은 중세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 >[[http://veritas.kr/articles/9249/20101129/%EA%B8%B0%ED%9A%8D%EC%97%B0%EC%9E%AC-%EC%9D%B4%EC%9E%A5%EC%8B%9D%EC%9D%98-%EA%B5%90%ED%9A%8C-%EC%97%AD%EC%82%AC-%EC%9D%B4%EC%95%BC%EA%B8%B0-42.htm|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 당시 대학생들은 현재보다 더 나이대가 다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최고의 개망나니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현대 대학생들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암기를 해야 했다. [[양피지]] 도서가 웬만한 책1권 쓰려면 최소 수십~수백 마리의 양을 도축해야 할 만큼 매우매우 고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학생들이 지금처럼 전공교재를 개별적으로 가질 수 없었다. 또 중세 대학식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려면, 학생들이 미리 수업할 부분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암기(!)해 두고 수업에 임했다. 이런 학업과 기타 사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술 마시고 싸우는 것으로 풀다 보니, 학교 주변 주민들과 대학생들은 원수지간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파리 대학교]] 등 일부 중세대학에는 무려 치외법권(!)과 유사한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었다. 이는 중세 대학이 기본적으로 황제, 교황 등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세력들을 뒷배경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주민들 역시 잘못이 없는 게 아닌 것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 집 주인들만 해도 집세를 학생들한테만 일반인보다 더 비싸게 받는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분노한 학생들이 집 주인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하자, 겁을 먹은 집 주인들이 집세를 내리는 것으로 합의를 봐야 했다. 또한, 수시로 술먹고 패싸움하는 건 기본에, 여자 납치, 도둑질, 기물파손까지 있었고 이런 패싸움을 말리려고 수비대가 출동했다가 쌍방 간에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건 학교 안에서도 여전했는지 당시 대학의 학칙에는 '수업 중에 무기를 가지고 오지 말 것, 점수 가지고 선생에게 복수하지 말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도 당대 대학생들을 보는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데, [[팡틴]] 가지고 놀다가 임신시키고 튄 그놈이 대학생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학생들을 통제해야 하니 당연한 말이지만) 교수들도 폭력적이었다는 사실. 교수회의 중에 자기랑 문제가 있던 동료 교수 여러 명을 끔찍하게 살해했다가 최종적으로 대학에서 추방당한 교수도 있었고, 자기를 비판한 사제에게 앙심을 품고 제자들을 시켜 살인을 지시하는 교수도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당시 대학이란 기관이 이론상으로는 수업료만 내면 [[농민]]의 자식들도 다닐 수 있어 계급 상승이란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학생이나 교수들이나 교회에 속하지 않은 당대 세속 지식인 사회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나 플랑드르 일대, 라인강의 제국 자유시들 같은 특출나게 도시화가 밀집된 지방들 빼곤 기본적으로 귀족 자제들, 특히 그중에서 상속에서 비껴나가서 고급 지식이라도 배워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많았다. 이러다 보니 기사 계급의 다혈질적 폭력성은 대학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 되었고, 근대에 진입하면서도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지금도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중동부 유럽에는 종종 있는 대학 결투 클럽 같은 [[결투]]나 폭력적 [[학생운동]] 같은 대학 문화에 흘러 들어갔다. 게다가 사실 근대 이전 유럽 사회가 깨끗한 식수가 마련하기 힘들어 어린 아이들 부터 일상적으로 물 대신 술을 마신 것도 있고, 계급과 배경 막론하고 어쨌든 현대에선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폭력적이었으며, 유혈 사태에 덜 민감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중세]] 대학생들은 거의 주당이어서 웬만해선 금전에 쪼달렸다. 집세와 책 대여료, 수업료가 비싼 것도 있다. 이외에도 생활비 역시 많이 들었다. 이 때문에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자도 있었다고 한다. 덤으로 '어떻게 여자를 저녁 식사자리에 꼬시는가 하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등골 브레이커는 여전하다. 당시 학생들은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이던 교회가 후원하는 미래의 사회지도자들로서 일종의 특권계층을 형성했고,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권리를 누렸다. 대표적인 2가지가 '면책특권과 병역면제'였다. 이외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교수를 초빙하기도 하고, 수업이 맘에 안 들면 단체로 쫓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교수들의 급여가 학생들이 낸 수업료에서 나왔기에, 대학에서 학생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개인/가족 단위의 기부금이 대학 운영 자금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학들은 학생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스탠퍼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MIT]] 등. 요즈음이야 교수를 마음대로 쫓아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학점 인플레가 바로 이러한 영향력이 낳은 결과이다. >[[볼로냐 대학교|볼로냐 대학]]의 특징은 학생이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각 동향단은 학생장(rector)을 선출하여 조합을 대표하게 했다. 각 학생 조합은 자체 학생장의 재판권에 복종했으며 초기에는 스스로 [[교수]]를 채용하여 교수들에게 수업시간 준수나 강의의 체계성 등 상세한 규칙 조항을 준수하도록 규정했으며 그러한 조항에 입각하여 교수들의 봉급을 지불했다. 교수들은 전적으로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 의한 집단 수업거부는 교수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위협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교수들은 학생장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볼로냐를 떠나려면 허락을 얻어야 했으며, 강의를 늦게 시작하거나 너무 오래 끌면 벌금을 내야 할 정도였다. >---- >-[[박승찬]],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보루-」''', 『가톨릭철학』, 제26권, 2016, pp.5-56, p.13. 이밖에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수에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법학과의 경우 간혹 저술 계획에 관해 묻는 경우가 있어 실제로 어느 교수는 자신이 서술한 책의 서문에 '시민법 교수인 누구누구는 학생들의 희망과 요구에 부응하고자 특별히 이 책을 쓴다'라는 책의 서술 목적을 분명히 밝혀 두었다. 또한 수업 역시 실습에 가까운 위주로 진행되어 법학과의 경우 일반적으로 두 명의 학생이나 두 조의 학생이 상호변론을 하거나 한 학생이 문제를 제기하면 반대 혹은 찬성의 논거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교수가 재판관의 역할을 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밖에도 교수들 사이에 법률문제를 놓고 광장에서 변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는 학생들도 참석해 변론을 통해 논리력과 [[레토릭|수사력]]을 키울 수 있으며, 이는 법학을 가르칠 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900261&search_head=220&page=1|토론-중세 대학의 꽃]] 그리고 오늘날의 대학과 달리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학교 건물이 없었다는 점으로 이는 당시 [[볼로냐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 역시 마찬가지로 이때는 교수가 살고 있는 가정집이나 교회에 붙어 있는 부속 건물 등에서 수업을 해야 했는데, 교수 하나가 학생을 가르치는 글방과 같은 형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학생 수는 교수의 인지도에 따라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500명으로 천차만별이었으며, 시험은 성당의 사교관이나 사제관에서 치러졌고, 중세 시대 이후에 점차 제대로 된 대학 건물들이 세워지긴 했지만 20세기까지 가정집에서 수업하는 곳이 많았다. 중세 중기부터 세워졌던 대학의 리스트는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edieval_universities|영어 위키백과]]를 참고하면 된다.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의 'University'에 대응되는 뜻으로 '대학(大學)'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곳은 [[일본]]이며, 시초는 당시의 [[제국대학]]이다. 중국에서는 현재의 [[베이징대학]]에 해당하는 경사학당(京師學堂)이 일본의 역어를 수용함으로써 지금처럼 바뀌었고, 따라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4년제 고등 교육 기관은 대학이라고 통용된다. 한국에서는 4년제 대학[* [[건축학과]]는 5년, [[의치한약수]]는 6년.]과 2·3년제 [[전문대학]][* [[간호학과]]는 4년.]으로 구분한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식민지의 각 대학은 "[[파리 대학교]]식 교육 모델"이라 하여 중세의 [[자유학예]] 전통에서 조금밖에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1810년 [[프로이센]]에서 빌헬름 폰 훔볼트가 훔볼트식 교육 모델에 따라 세계 최초의 근대적 연구중심대학인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베를린 대학교]]를 설립한 뒤로 대학들은 전문가와 연구자를 양성하는 석박사 학위와 대학원, 발전하는 학계와 사회의 요구를 반영한 다양한 전공과 학과, 각 교육자 및 연구자의 자율성, 각 학생의 자기주도학습, 입시에서 성별, 종교, 인종 등에 따른 차별 금지 등을 보장하도록 서서히 개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세워졌고, 세계 각지의 수많은 대학이 서로를 벤치마킹하여 새로 설립되거나 [[성균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교육기관들이 근대식 대학으로 [[성균관대학교/역사|전환됐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의 [[맨체스터 대학교]],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및 수많은 [[주립대학]]들, [[일본 제국]]의 [[도쿄대학]], [[조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처럼 변화하는 사회상을 따라 작은 [[기술대학]], [[사범대학|사범학교]], [[농과대학]], [[의과대학]] 등으로 설립됐다가 19, 20세기에 걸쳐 중산층의 성장과 고등교육 수요의 급증에 따라 거대한 명문 [[종합대학]]으로 성장한 경우도 많았으며, 1898년 [[변법자강운동]]에 의해 [[청나라]]에 [[베이징대학]]이 설립되는 등 기존 대학이 없던 문화권에도 대학들이 생겨났다. 한편 미국에서는 중세의 [[자유학예]] 전통을 간직한 체로 교양교육 위주로 발전한 학부중심대학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고 부른다.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신흥 대학들은 [[코넬 대학교]]처럼 앞서 언급한 근대적인 특징들을 모두 가진 체로 설립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 이전에 설립된 대학들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으로 사회 전체가 발칵 뒤집어져 버린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 정도를 제외하면 이 개혁들이 완벽히 자리 잡는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를 들어 [[영국]] [[옥스브리지]]의 주요 칼리지나 [[미국]]의 [[콜로니얼 칼리지]] 등이 1960~1980년대가 돼서야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던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