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통령경호처/역사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행사 중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 과정에서 경호실이 보여준 모습은 정말 엉망이었다. * 이 사건에서 경찰을 포함한 경호당국은 외국인이라는 것에 혹하여 암살자를 2선까지 통과시켰다. 당시 행사장이었던 국립극장을 경비하던 경찰은 차량 비표가 없었는데도 대형 외제차(Ford 20M)에 위축되어 그냥 통과시켰으며, 행사장 안 역시 비표를 단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었음에도 극장 입구를 경비하던 경찰관은 [[문세광]]이 [[일본어]]를 쓰는 것에 혹하여 초청받은 외국인 VIP로 판단하고 비표가 없는데도 통과시켰다. 이는 경호원이 외국어를 전혀 못할 때 외국인에게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경호의 기본인 육탄 방어에 충실하지 못했다. 사건 당시 중앙 복도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관들은 문세광이 권총을 들고 VIP가 연설중인 단상을 향해 중앙 복도를 유유히 걸어나가는 것을 보고도(VIP가 연설중일 때 일반인은 중앙 복도로 나가서는 안된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으며, 단상 위에서도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 대적 자세를 취했을 뿐(이것도 경호 측면에서 보면 문제다. 이유는 본문에 서술) 다른 경호원들은 총소리에 놀라 커튼 뒤에 숨었다가 문세광이 제압된 뒤에야 연단을 에워싸고 호위하는 충격과 공포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긴장한 경호원이 총기를 오발하여 합창단원 장봉화 양[*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을 사망하게 하는 개막장 행각을 저지르기도 했다. * 총에 맞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VIP가 연설을 그대로 하도록 놔두는 3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암살자가 제압되고 총에 맞은 육 여사가 병원으로 실려간 뒤에도 박정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연설을 계속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담대한 박정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암살자가 제압되었다고 해도 행사장 안에는 제2, 제3의 암살자가 또 있을 지 모르는 일이므로 사건이 일어나면 경호 당국은 무조건, 반드시 VIP를 행사장에서 피신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박종규는 경호실장에서 물러나고, 그 뒤를 [[차지철]]이 이었다. 차지철은 차관급이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는 것에 이어 현역 육군중장 및 소장을 경호차장으로, 육군준장을 차장보로 임명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까지 경호실장이 지휘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하여 경호실을 사실상의 사병집단으로 만들었다.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모두 경호실 작전차장보 출신. [[파일:4공경호실제복.jpg|width=100%]] 또한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경호실장 직속의 군·경찰 조직]]을 추가로 창설했다. 물론 민간조직에 군 부대를 집어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편제 상으로 [[수방사]] 예하였다. 아예 포병대까지 산하에 두려고 해 많은 이들이 차지철의 쿠데타를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경호대는 별도의 제복까지 지급되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매주 토요일마다 경복궁 제30경비단 연병장에 국회 및 정부 요인들을 초청해 [[국군의 날]] 서열식을 모방한 '하기식(下旗式)'이라는 행사도 진행되었다. 게다가 정치에 개입하여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킨 적도 있다. 아무튼 막강한 군사력과 기타 권력들 때문에 경호실은 경호를 전담하는 부서가 아니라 상술한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사병처럼 기능했고, 당시 국내에선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정보기관으로 위상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경호실은 경호 외에 다른 분야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던 나머지, 한 눈이 팔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막지 못했다. 박 대통령 암살 당시 경호실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초기의 경호실은 [[중앙정보부]] 예하에 있다가 갈라져 나온 기관이었다. 10. 26 사건이 터지기 얼마 전부터 [[부마민주항쟁]]의 대응안을 두고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립 중이었다. 이 대결 구도에선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잘 보일 겸, 경쟁자도 제거할 겸 김재규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차지철은 본인의 가장 위험한 적수를 그냥 대통령 면전에 갖다가 앉혀놨다. * 사건 당시 차지철은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자와 국가원수가 함께 대면하는데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다.[*다만 이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장에서 술맛 떨어지니 차지철에게 권총을 휴대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 경호실 관계자들은 대통령 최측근에서 상시 경호를 하는 것이 본인들의 사명인데, 궁정동 안전가옥 내에선 경호를 그냥 중정 요원들에게 떠넘기고 자기들은 안에 들어가 식사하거나 쉬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수장인 차지철과 김재규는 서로 적대하는 사이인데도, 정작 휘하 요원들끼리는 과도할 정도로 친밀했다. 그래서 만약 양측이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할 경우, 이에 냉정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통령 암살을 작당한 중정 요원들에게 뒷통수를 맞아 전멸했다. 그 해 11월 [[정동호(1935)|정동호]] 육군준장이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정동호는 당시 경호실 상황실장으로 경호실 내에선 서열이 4번째였는데도 직무대리가 되었다.각각 2,3위인 이재전 경호차장과 [[김복동]] 경호차장보는 10.26 사건의 도의적 책임 문제로 인해 이 차장은 보안사 구속 직후 강제 예편, 김 차장보는 5군단 부군단장으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동호는 하나회 출신인 반면, 김복동은 전두환 및 노태우와 사이가 나쁜 점도 작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