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타협 (문단 편집) == 이후 == 우여곡절 끝에 대타협이 통과되면서, 어찌됐든 헝가리인은 이중 제국의 지배층이자 실질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보다 큰 정치적 연합체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이후 안정적인 번영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 헝가리인 스스로가 이 시기를 '평화로운 황금의 시대'라고 회상하고 있을 정도[*출처 「두 가지 정체성의 공존: 헝가리인의 비유럽적 기원과 유럽적 ‘자기인식’」(김지영, 2013) P15]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 대부분의 헝가리인은 불만이 많았는데, 대타협 자체가 오스트리아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대타협을 지지하는 자유당에 반대했고 총선 때마다 헝가리 민족주의 정당을 지지하여 표를 던졌다. 반대로 자유당은 소수민족들의 표를 받아 계속 집권당의 지위를 이어가면서, 헝가리 의회에서는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는 자유당 vs 헝가리인의 지지를 받는 헝가리 민족주의 정당들의 대립 구도가 이어졌다. 대타협을 통해 재편성된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역시 삐걱거렸는데 금융 및 관세 문제로 10년마다 오스트리아와 재협상을 할 때마다 협상 내용을 놓고 헝가리 의회에서는 헌법 위기가 터져나왔으며 법률상으로는 모든 민족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기는 했으나 대타협에 미온적인 헝가리인들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헝가리 정부가 헝가리 영토 소수민족들에게 마자르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슬로바키아|헝가리 북부]]의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의 [[루마니아인]], [[보이보디나 공국|버이더샤그]]의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소수민족의 불만으로 인한 제국의 붕괴를 우려하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게 마자르화 정책을 중단할 것을 권고했으나 [[가해자가 된 피해자|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권고를 거부하고 마자르화 정책을 지속했다.]][* <모순의 제국>에서는 대타협 이후 헝가리 민족주의의 폭주에 대해 "헝가리 민족주의는 다민족 국가를 하나로 어우르던 대리인 역할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 가장 오랫동안 충성하며 이중 제국을 이끌었던 헝가리 민족은 이제 다른 민족들처럼, 수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제국에 자신을 얽어매던 유대의 끈을 잘라버렸다."라고 묘사한다(286쪽).] 결국 대타협 역시 문제점이 많은 미봉책이라는 것이 점차 증명되었으며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중 제국 체제의 한계를 실감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중 제국을 각 민족별로 동등한 주권을 누리는 연방국가로 재편성]]을 시도하여 슬라브계, 이탈리아계, 루마니아계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황제와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었던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반발로 삽을 뜨지도 못하다가 [[사라예보 사건|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황태자 본인이 암살당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1918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과 더불어 이 대타협도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생제르맹 조약|오스트리아 제국도]], [[트리아농 조약|헝가리 왕국도]] 산산조각났다. [[분류:1867년 협정]][[분류:오스트리아 제국]][[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