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타협 (문단 편집) === 채택 === 황제의 제안을 받은 헝가리인 지도층 사이에서는 제안의 찬성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황제의 제안에 반발했고 헝가리인들 대다수 역시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라며 반대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친 합스부르크 성향의 헝가리 자유주의자들은 제안에 찬성하였는데,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훗날 자유당을 창당하는 [[데아크 페렌츠]]는 1848년 혁명 당시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던 민족주의자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극단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견지한 사람이 [[보헤미아 왕국|뵈멘 왕국]]의 [[체코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였다.] 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 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대타협을 통해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통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반프로이센파였던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1809 ~ 1886)이 재상으로 재직 중인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야 했기에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양측의 계산이 일치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867년 5월 29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헝가리 대표 데아크 페렌츠가 대타협 문서에 서명하고 새로 구성된 헝가리 의회가 이를 비준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따라서 1867년의 대타협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합병도 아니고, 독립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동군연합]]이라는 유럽의 정치적 봉건제의 유산을 성문화된 헌법에 따라 근대적 방향으로 부활시킨 것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