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종(당) (문단 편집) === 토번군의 장안 함락과 환관 정원진의 실각 === 명장 [[가르친링]] 사후 [[토번]]은 약해졌지만, [[안사의 난]]이 벌어지는 와중 당나라에 열세였던 국력을 회복하고, 장안 서쪽 100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런 상황에서 선제인 숙종은 침략을 막고자 매해 [[비단]] 50,000필을 바쳤는데, 대종이 즉위하면서 이를 그만두었다. 이에 새로 즉위한 14세의 [[토번]] 왕 [[적송덕찬]](赤松德贊)은 격노했고, 이를 빌미로 당나라의 영토를 넘보았다. 763년 토번군이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것'''은 당나라 입장에서는 [[서역]]으로 가는 목구멍을 막은 격으로 사실상 전역이 상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토번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10월, [[다짜뤼공]]이 [[무려]] '''2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검남[* [[쓰촨성]] 일부]과 [[관중#s-4]]으로 밀고 들어왔다.('''광덕지변''') 결국 10월 7일 대종은 섬주(陝州)로 피난했고, 이틀 뒤 9일 토번군은 비워진 수도 [[시안(도시)|장안]]에 입성하여 허수아비 황족인 [[이승굉]]을 당나라의 황제로 세웠다. 하지만 부원수 [[곽자의]]가 돌아와 맹활약하여 토번군은 12일(혹은 15일) 만에 장안성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엄청난 활약은 [[곽자의]] 항목 참조. 참고로 그가 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병사는 고작 수십, 수백 명이었고, 토번군을 구원군 소문으로 도망치게 할 때 그가 모은 병사는 고작 수천 명이었다.[* 토번군 진영에 풍토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미 대약탈이 끝난 상황이기도 했다.] 한편 토번군의 침공이 저지되자 그동안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던 환관 정원진은 11월 2일에 삭탈관직되어 낙향을 명령받았는데, 계속 복권할 기회를 노리고 장안을 떠나지 않자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전란은 끝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