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쭌이 회의(준의 회의) === 1935년 1월 9일 마오쩌둥과 보구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준의로 입성했다. 마오쩌둥, 뤄푸, 왕자샹 등은 검군여장 이샤오취안의 저택을 징발하고 짐을 푼 다음, 닭고기, 배추 등으로 배를 채우며 다가올 회의를 준비했다. 다급해진 보구는 녜룽전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녜룽전은 거부했다. 마오쩌둥은 지지자들을 포섭하며 일전을 기다렸고 1월 15일 새벽, 여평 회의에서의 합의대로 귀주 군구 사령관 바이후이장의 집 2층 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정치국 확대 회의, 소위 쭌이 회의가 개최되었다. 마오쩌둥, 왕자샹,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천윈, 주더, 보구, 뤄푸 등 8명의 정치국 위원과 덩파, 하극전 등 2명의 후보 위원, 리부춘(이부춘), [[류보청]], [[린뱌오]], [[녜룽전]], [[펑더화이]], [[양상쿤]], 이탁연 등 홍군 지도부, 홍성보 주필이며 중앙 비서장 덩샤오핑, 코민테른 요원 오토 브라운과 그의 통역관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기록마다 참석자 숫자와 구성에 대해 약간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신경 쓸 수준은 아니다.] 오토 브라운을 제외한 참석자들은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고 늦게까지 회의가 지속될 때를 대비하여 램프를 준비했다. 쭌이 회의에선 장정 과정에서 군사상 실패 원인, 군사 지휘 상의 문제가 없었는지, 그리고 이핑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귀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장강을 건널 지를 논하였다. 회의 시작과 함께 보구가 5차 초공 작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 분석한 보고서를 낭독했다. 보구는 패배의 원인이 국민당의 압도적인 전력, 국민당 지배 구역 내부의 미약한 공산당 세력 등에 있다고 외부적 요인을 들었으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토 브라운의 통역인 오수권은 보구의 보고가 인상을 주지 못했으며 책임 회피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보구의 뒤를 이어 보고서를 발표한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지배 구역에 대한 정치 공작의 불충실성, 유격전 전개의 미약 등을 들며 패전의 책임을 느낀다고 자아비판을 하여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저우언라이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비판했다. 바로 뒤이어 뤄푸가 마오쩌둥과 왕자샹을 대변하여 보구에 대해 비판을 퍼부었고 뤄푸의 발언이 끝나자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준비해둔 원고를 바탕으로 한 시간에 걸쳐 발언을 진행했다. 이날 마오쩌둥은 루이진에서의 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며 루이진을 버린 것은 당의 잘못된 노선을 관철시킨 해당분자의 실책이 크고 이를 바로잡아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임시 당 중앙과 오토 브라운을 맹비난했다. 그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돌려 도망쳤으며 그들이 한 것은 유치한 전쟁놀이에 불과하다고 외쳤다. 오랫동안 비난을 퍼붓던 마오쩌둥은 그럼에도 홍군의 주력은 유지되고 있다고 낙관적인 어조로 전환하며 운남, 귀주, 사천에 새로운 소비에트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는 왕자샹이 역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비판했고 발언 요구가 빗발쳐서 회의는 1월 17일까지 지속되었다. 주더, 펑더화이, 녜룽전, 린뱌오가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펑더화이는 전략상의 실패와 홍군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류사오치도 좌경 모험주의 노선으로 정치 사업이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평소에도 오토 브라운의 전술이 멍청하고 우둔하다고 까던 린뱌오의 태도가 거칠었다. 이에 보구는 정치 노선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근거한 것으로 정확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오토 브라운도 군사 전략에 어떠한 잘못이 없다고 맞섰다. 보구의 유일한 편이었던 카이펑도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알지도 못한다고 비판하며 반박했다. >"당신의 전술 방식은 그리 현명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삼국지연의]]>와 <[[손자병법]]>에 토대를 두었을 따름이다. 어떻게 그런 책에 의존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마오쩌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은 삼국지연의만 읽었을 뿐 손자병법은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카이펑에게 손자병법은 전체 몇 장이고, 첫 장에서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마오쩌둥이 손자병법을 읽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비판했던 카이펑 역시 손자병법을 읽어본 적이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 쭌이 회의를 계기로 손자병법 탐독에 들어갔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면서 완전히 마오쩌둥의 편에 섰다. 역시나 마오쩌둥 반대파였던 류보청도 이때 마오쩌둥의 편으로 갈아탔다. 오토 브라운은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문 옆에 앉아서 회의 내내 거의 발언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울 뿐이었으며 오수권의 불성실한 통역 때문에 추후에 토의 의사록이나 결의를 얻기 전까지는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그는 끝에 마오쩌둥이 말하는 중국 내전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1군과 약간의 시간을 보내게 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승인되었다. 보구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짓고 험악한 눈초리로 참석자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는 끝장난 상태였다. 회의는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났고 뤄푸가 의촉을 받아 <국민당군의 제5차 초공 작전에 반대한 것에 대한 중공 중앙의 총결 결의>라는 초안을 작성했다. 뤄푸는 나름 절충안을 내놓았는데 총노선은 옳았으나 5차 초공 작전과 장정에서 군사 노선에 오류가 있었고 이 책임은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결의에서 보구의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부정확하다고 부정되었고 중앙 소비에트 지구가 공격받은 이유는 군사 지휘와 전술 전략상의 과오 때문에라고 결론지어졌다. 이 결의안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오토 브라운은 이 결의가 서류로 확정되지 않고 투표 형식도 없었으나 대다수의 승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정치국 회의가 열렸고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 위원으로 임명되고[*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이 정치국 의장이며 중국공산당 의장이 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이에 부합하는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뤄푸, 왕자샹이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으며 저우언라이는 완전히 마오쩌둥 그룹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의 조직 인선에 대하여 기록들이 상당히 엇갈리는데, 가령 총서기 보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기록이 일치하지만 그 시기에 관하여는 기록마다 편차를 보이며 뤄푸의 총정치국 주임 임명, 저우언라이의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임명에 대해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하지만 쭌이 회의에 이은 조직 인선에서 마오쩌둥이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직 인선이 끝나자 마오쩌둥은 임신 상태였던 허쯔전에게 "모든 것이 잘되었소. 이제 나도 말할 권리를 갖게 되었지."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오쩌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네 어머니가 아주 오랫동안 날 기다렸단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자 앉을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지. 처음에는 짐짓 아닌 척 속일 생각이었는데 너무 기뻤어. 사람이 기쁘거나 행복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거든. 나는 뒷짐을 지고 방안을 어슬렁거리면서 천천히 말했지. >'사람들이 나 같은 부처도 아직 쓸 만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야. 그랬으니 나를 환한 곳으로 끄집어내어 중앙 위원회 정치국 상임 위원으로 앉혔겠지. 이는 그들이 아직까지 라오마오를 존경하고, 자신들에게 뭔가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그래 자격이 없다고! 그들이 나를 중앙 상임 위원으로 선임한 것은 그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확실히 나는 겸손하지 못했어. 국가의 운명이 위급한 상황에 있을 때는 모든 일반 농민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만 해!' >네 어머니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단다. 그날 저녁은 정말 행복했지." >---- >마오쩌둥이 허쯔전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리민에게 설명한 상황. 2월이 되자 정치국원 겸 중앙 위원회 서기를 유지했던 보구에게 뤄푸가 상무 위원회 회의에서 천윈,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총서기 자리를 내줄 것을 요구했다. 오토 브라운의 설명에 따르면 쭌이 회의에서 사실상 총서기 자리를 잃었던 보구는 항복하고 총서기 자리를 뤄푸에게 넘겨주었다. 3월 4일 전적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더가 사령관에, 마오쩌둥이 전적 정치 위원에 임명되었다. 주더는 중앙 홍군 총사령관에 유임되었고 저우언라이도 총정치 위원으로 유임되었으나 3월 5일 전투 준비가 완료된 부대는 전적 사령부 소속으로 전환되면서 마오쩌둥이 다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군은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쭌이를 떠났다. 중국공산당과 혁명 사관에 충실한 사가들은 홍군이 대장정 와중에서도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지켰다고 미화하지만 이는 공산당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며 홍군의 철저한 약탈로 번성했던 쭌이는 홍군이 떠날 무렵에 폐허로 전락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