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우그룹 (문단 편집) === 정설 - 막대한 채무와 [[분식회계]] === 김우중 회장의 추징금이 괜히 '''17조 원'''[* 임원 5명에게 부과된 금액을 합치면 총 23조원이다.[[http://news1.kr/articles/?1326846|기사 링크]]]이나 되는 게 아니다. 저 어마어마한 금액을 가짜 장부 등으로 회계를 조작해서 은행을 속이고 빚을 얻어낸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이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며 미국에서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주에게 '''징역 150년형'''을 때릴 만큼 엄청난 중죄이다. 남의 돈으로 사기쳐서 다 날려먹었으니 당연히 토해내야 되는데 그 돈이 엄청나다. 17조 원이면 2020년대 기준으로 약 14조 원인 [[이재용]]의 개인재산을 뛰어넘는 금액이다. 김우중 회장의 재산이 곧 대우그룹에서 나오며 이는 대우그룹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면서 감당할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식회계의 총합은 '''20조 원'''이 넘었으며[* 참고로 [[엔론]]의 분식 회계 규모는 15억 달러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약 2조 원 정도였다. 2006년 김우중의 항소심에서 최종 인정된 대우의 분식회계 금액은 분식회계 21조, 사기대출 9조, 외화밀반출 23조였다.[[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0605301819181#c2b|기사]]] 그룹 부채의 총합은 추산하기로 최대 약 '''89조 원'''[* 국내 약 60조원과 해외 약 30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1999년의 정부 예산이 84조원으로 대우그룹의 부채는 이미 '''대한민국 1년 예산보다 커''' 정부에서조차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나라의 국고가 거덜나서 [[국제통화기금]]에게 돈까지 타서 쓰고 있는 마당에 그만한 돈을 보전해주기 쉽지 않았다. 그랬기에 정부는 대우그룹의 도산 및 해체를 용인하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룹 해체 이후에 대우 계열사들에게 총 29조 8천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등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다. 외환위기 때문에 다년간 투입된 정부의 공적자금이 총 180조원 가량이었는데 그중 6분의 1이나 대우에 들어간 것이다. 대우그룹을 온전히 살리기엔 도저히 부실의 정도가 무지막지했기에 그룹을 조각내서 회생 가능성이 있는 우량 계열사들만이라도 겨우 살려내어 다른 기업집단에 파는 방법으로 공적자금 회수를 기대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미래에셋대우]], [[포스코엔지니어링]], [[포스코인터내셔널]], [[위니아전자]], [[GM 한국사업장]], [[타타대우상용차]], [[자일대우버스]] 등이 정상화되어 [[대한민국/경제|대한민국 경제]]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더구나 [[외환위기]]라는 역대급 사태 중에도 김우중 본인의 현실인식이 [[http://joongang.co.kr/article/7161338|매우 낙관적]][[http://joongang.co.kr/article/7171396|이었던데서]]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1574|그룹해체의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관리 체제에 속했던 김대중 정부의 초기정책에는 [[국제통화기금]]과의 권고 및 협약을 이행하는 방안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개중에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하를 두는 강수가 있었다.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최대한 슬림하게 만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30대 재벌 중 대우를 제외한 29개 재벌들은 이 [[구조조정]] 시행을 전제로 하는 계획서를 5일만에 제출 완료하였지만, 김우중회장은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IMF 사태 초기인 1998년 2월, 김대중을 만나 [[여신#s-2|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운 국가 프로젝트]]를 내세웠으며, 3월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수출론을 주장하였다. 김우중은 '''현 경제위기 및 정권의 강한 구조조정 권고는 일시적이고, 대출을 더 받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아 위기 중에도 세계 경영 및 국내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다. 대표적으로 1998년에 (주)대우 한회사 부채만 22조원으로 국가예산의 30% 차지하는 상황에서도 구조조정은 고사하고 [[쌍용자동차]] 인수로 판을 벌이며 쌍용차의 설비를 담보로 정부의 추가대출을 기대한일이 있다. 그야말로 당시 구조조정으로 자기살을 깍아내던 다른 재벌들과는 다르게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한 것이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이런 과감한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김우중의 과감한 투자 여파로 대우그룹 실적이 조금씩 악화되어 지난날 김 회장 및 대우그룹에서 '''경영성과'''로 홍보해온 해외 회사들(예, 벨기에 Universal, 영국 자동차 연구소[* 중형 승용차 [[레간자]]가 이곳에서 개발한 작품이다])이 하나둘씩 부실화되던 상황에서 [[IMF 사태]]라는 환란은 그런 방식으로 넘기에는 그 벽이 너무 높은것이었다. 마침내 [[노무라 증권]]이 '''<대우 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또한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법인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장부상으로만 수출실적을 내는 '''밀어내기식 수출'''과 손해보면서 파는 '''적자수출'''로 수익 구조를 악화시켜 그룹 전체 영업이익은 '''1998년 기준으로 6천억 원 적자'''를 기록하고 금융비용의 증가를 초래시키며, 그 규모는 끝내 조 단위를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대우는 삼성과의 [[빅딜]]로 타개를 시도하였지만 대우의 빚더미를 파악하고 놀란 삼성측이 자기들까지 같이 동귀어진의 수렁에 빠져들것 같아서 거부의사를 통보하였고, 급기야 몰린나머지 1999년 4월에 자동차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팔아버린다는 구상의 구조조정을 실시하지만 아무도 부채덩어리 계열사들을 사려고 하지는 않아 역시 실패한다. 결국 8월, 계열사 전부 워크아웃으로 들어가게 되고, 11월 초에 대우 사장단은 사퇴를 제출하고 그룹은 공중분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