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숙청 (문단 편집) === 전통주의적 시각 === 전통적인 해석은 두 방향이 존재하는데 각각 [[한나 아렌트]] 이래로 시작한 "전체주의론"[* [[나치 독일]]과 스탈린 시절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라는 맥락에서 비슷한 사회로 보는 입장이다.]에 입각한 대숙청 해석과 [[소련 공산당]]에서 내놓던 관제 역사 서술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은 대체로 전체주의론의 시각을 의미한다.[* 참고로 전통주의적 시각은 사회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다.] [[파일:external/lexicon.dobrohot.org/00132965.jpg|width=300]] 세르게이 키로프(Сергей Киров, [[1886년]] [[3월 27일]] ~ [[1934년]] [[12월 1일]]) 전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대숙청은 스탈린의 과격한 정책이 빚어낸 사회 모순으로 발생한 불만 세력을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스탈린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분쇄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농업정책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스탈린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고 그 대안으로 떠올랐던 인물이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1934년 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가 단 3표[* 스탈린의 경우 반대표가 292표를 넘었다.]일 정도로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파였지만 스탈린에게 몇 차례 산업화 속도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고,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키로프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수도인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머물게 하였다. 키로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당사의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그 해 암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이를 공산당 내의 파시스트들과 연결돼 있는 [[제5열]][* 진격해오는 정규군에 호응하여 적국 내에서 각종 모략 활동을 하는 조직적인 무력집단.]의 소행이라고 선전하여 당내 첩자들의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반(反) 스탈린파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제외한 [[10월 혁명]]의 원로들과 경쟁자들, 최종적으로는 반(反) 공산주의 계층들까지 모두 쓸려나가 버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스탈린 절대지배체제가 확고히 수립된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보안 문제에 스탈린이 직접 간섭하는 등[* 대숙청과 전혀 무관한 부됸니나 볼로쇼프 혹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보안 문제 간섭이나 숙청과 무관한 병사 내지는 사고사에 대한 보안 문제를 봐서 이 설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키로프의 암살을 전후해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어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는 키로프의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벌어진 치정극이라는 설부터 반소련 음모, 스탈린이 손수 사주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의 사주설을 주장했다. 사실 스탈린은 혁명 후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경고하면서 대숙청 10년 전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레프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그 이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처형된 것과는 달리 외국 추방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렇게 인정이 많을 리가 없었고 이후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계속 까대자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레닌 시절의 볼셰비키는 제정을 무너뜨리는 데 같은 혁명동지였으나 방법론 차이로 갈라졌던 [[멘셰비키]]들을 처형하지 않고 대체로 망명을 허용할 정도로 혁명 동지들에 대한 처형은 매우 자제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축출한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시키고 과격한 산업화를 추진하자 당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다. 당시만 해도 스탈린보다 경력이 화려한 혁명가들이 당 내에 있었던지라 만약에 중앙위원회에서 불신임 투표라도 당하면 그는 그대로 정권을 잃고 정치계에서 묻힐 판이었다. 그래서 당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뽑아서 자신의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게 농업집단화였는데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이 정말로 참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독소전쟁]]보다 이 시기의 반란 진압이 더 참혹했다고 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탄압하니''' [[장교]]들이 스탈린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원이었던 몇몇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에게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집단화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아사하였는데(홀로도모르) 이 책임은 모두 무리한 산업화를 밀어붙인 스탈린이 져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산업화를 중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독선을 가졌는데 이건 스탈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봐도 당시 만약에 산업화를 포기했으면 몇 년 후 일어났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스탈린 독재와 대숙청을 합리화했으며 결국 이는 실존하는 반대파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서 대숙청 후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를 기소하면서 넣은 죄목 중에 [[양성애]][* [[10월 혁명]]으로 허용되었던 [[동성애]]와 [[낙태]]는 스탈린 집권 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는 사실 [[차르]] 체제와 다름없는 '''보수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이전까지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건 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유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와 변태 성향을 포함할 정도로 [[사디즘|새디스트]] 성향이 있는 예조프가 숙청을 감독하면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웃기는 것은 사실상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리야도 [[로리콘]] 성향이며 새디스트였다는 것. 1937년 봄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체포되며 군부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내전]] 중 양성된 노련한 장교들을 누명을 씌워 정치적 혐의로 숙청해서 처형하거나 NKVD의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굴라크로 보내거나 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소련군]]은 몇몇 장성을 제외한 훌륭한 군인들의 씨가 말라 버렸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독소전이 개전하자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은 그때까지 죽지 않은 장교들을 다시 불러와서 복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고 죽은 사람 중에는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 같이 유능한 장교들도 많았으며 대독승전의 주역 중 한 명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숙청 전에도 소장이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다 뭉개지고 이빨도 절반이나 날아갔다가 독소전 때문에 살아났다. 주코프는 실제로 숙청 리스트에 올라갔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름이 슬그머니 빠졌으며 [[이반 코네프]]는 인맥줄을 잘 타 스탈린의 술친구인 보로실로프 원수 라인으로 들어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현대전]]에서 정말 무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셈. 그리고 무능한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장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원수 2명이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니]]다. 둘 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게 뼛속까지 처발린 다음 다시는 일선에 나서지 못했다. 대숙청 직후 벌어진 [[겨울전쟁|소련-핀란드 전쟁]]만 봐도 결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독소전 초반 소련군을 반신불수로 만든 것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으로 단련되고 임무형 지휘체계 등의 우수한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독일]] 육군, 루프트바페 등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소련 육군은 각개격파를 당해 분쇄되고 공군은 수천기의 비행기가 박살나 버려 제공권을 장악당해 초반에 '''수백만'''이 갈려나가 버렸다.] 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독일 방첩대(SD)가 소련군의 고위장교들이 [[독일 국방군|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를 흘렸고 거기에 위조된 투하쳅스키 원수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걸 본 스탈린이 '''"헐, 이 새퀴들이 내 뒤통수 깔 준비하고 있던 거야? 용서할 수 없다!"'''면서 예조프와 함께 고위장교들을 줄줄이 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NKVD가 일부러 군의 고위장교들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는 설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의심 잘하는 스탈린에게는 효과 직방이었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역정보를 스탈린이 간파하였음에도 오히려 이를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유든 간에 실제로 스탈린이 군에까지 대숙청을 옮기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은 꽤나 있는 편이다. 실제로 1937년 초까지는 민간에 대한 숙청은 많았어도 군대만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위의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이 군대에 슬슬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소련군은 고도의 기계화와 함께 신속한 기동력을 갖는 기동군을 창설하는 계획이 있었기에 군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당의 감시역인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위에 언급된 누명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기동전]] 구상 자체는 스탈린도 동의한 것이지만 하필이면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찍히기 쉬운 짓을 스스로 벌이고 있던 것. 대숙청 이전의 소련군이 [[킹왕짱]]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그나마 육성되기 시작한 장교들을 대거 제거한 것도 그렇고 장교들이 숙청에 대한 강한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몸 사리게 만든 것도 소련군의 전투력이 내려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극단적으로 몸을 사린 결과 자기 판단대로 창의적으로 지휘하지 못하고 전투교범 등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된 것. 덕분에 독소전 초기에 독일군이 감청한 유명한 대화도 나왔다. > "우리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너희들 미친 거냐! '''왜 암호로 보고하지 않는 거냐! 암호로 다시 보고해라!'''" 이미 공격을 받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다시 보고하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더 큰 문제는 보고를 받은 쪽, 그러니까 지휘관 쪽에서 통신보안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중 하나인 이중송신[* 동일한 내용을 도·감청이 가능한(= 암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회선을 통해 평문과 암호문 모두로 송신하는 행위. 사실상 적군에게 암호를 갖다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대한민국 국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대에서 엄히 금지하고 있다.] 금지를 무시하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숙청 직후의 붉은 군대가 얼마나 막장 상태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지경이니 [[우라돌격]]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론 우라돌격은 단순 돌격보다는 포병, 공군, 전차 등이 동반된 공격이었다. [[반자이 어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또한 위에 나온 상황같은 독소전 초기에는 우라돌격보다는 참호, 대전차포 등을 사용한 방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반이 되어 가면서 제대로 된 우라돌격 교리가 완성되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군이 반자이 어택 수준의 돌격을 한 것은 정치장교의 선동으로 인한 것이 주류였고 그 이외 상황에서는 진지에서 죽거나 도망칠지언정 반자이 어택 수준의 막장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 숙청의 규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소련에서 불과 다섯 명뿐이었던 [[원수(계급)|원수]]들이 두 명만 남고 몽땅 처형되었다는 것만 언급해도 충분할 정도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투하쳅스키의 경우는 실제로 반(反) 스탈린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투하쳅스키와 스탈린은 [[러시아 내전]] 당시 사령관-[[정치장교]]의 관계 때문에 이후에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으며 투하쳅스키가 [[러시아 제국]]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내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인물이었다.]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 기간 동안 '반혁명 분자', '독일/[[일본]]의 첩자' 등 말도 안 되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비밀재판을 거쳐 목숨을 잃었다. 좀 어이없는 것은 예고로프와 블류헤르가 투하쳅스키의 비밀재판을 맡았던 군사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류헤르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도발을 쳐부수는 승리를 거둔 바가 있으며 [[장제스]]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그와 몇 년간 일하며 우정을 쌓은 꽤 준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건만 [[봉소전쟁]]에서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고 이겼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났고 결국 투옥 후 18일만에 사망했다. 예고로프는 결국 두 경쟁자를 가지쳐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도 [[서기장]] [[동지]]의 싸늘한 눈초리는 결국 피하지 못했다.[* 예고로프는 1939년 2월 22일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판 직후 즉결 처형당한 투하쳅스키에 비하면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 기간에 당연히 극심한 고문이 있었으리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하여간 옥사로 끝난 것으로 보아 투하쳅스키보다는 죄가 덜하다고 판단되었던 모양. 참고로 투하쳅스키는 1937년 8월에 처형당했다.] 결국 살아남은 원수는 위에서 언급했듯 무능하기 그지없는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보로실로프보다는 유능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니]]뿐. 여기에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술 친구이기도 할 만큼 개인적으로 스탈린과 친했기에 살아남았고[* 보로실로프는 스탈린과 굉장히 친해서 그와 접시를 던지며 싸웠다고도 하고 같이 뱃놀이를 갔는데 스탈린이 농담으로 "너 [[영국]] 스파이지?" 하니까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뺨을 때렸다'''고도 한다. 추가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들이 접시 싸움을 하는 걸 구경했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싸워도 보로실로프는 열심히 스탈린 앞잡이 노릇을 했다.] 보로실로프와 친하거나 그가 보호해준 장교들 상당수가 살아남아 독소전에서 활약했다. 그런가 하면 부됸니는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 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대 인물들에겐 숨이 턱 막히겠지만 후대 인물들에겐 나름 재밌게도 정보기관의 체포에서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 것이었다. 자기에겐 죄가 없으리라 확신하고 순순히 체포되는 사람들은 못해도 10년 형씩은 받았지만 길거리로 뛰쳐나가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고 소리지르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은 요원들이 당황해서 체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적어도 달아날 틈은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원수급 이하 수많은 장성들, 영관급 장교들도 이 풍파에 쓸려나갔는데 투하쳅스키의 추종자였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폴란드]] 스파이 활동 등의 혐의로 NKVD에 끌려가 발가락들이 전부 쇠망치로 짓이겨지고 아홉 개의 치아가 부러질 정도로 극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독소전이 시작되고 무능한 장성들이 전사 혹은 해임되기 시작하자 임시로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군적에 되돌려졌다. 이후 군단장이 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관광을 펼치면서 원수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금속제 틀니를 하고 살았고 금속 발가락이 내장된 부츠를 신고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했다고 한다. 대숙청은 다섯 원수 중 3명, 11명의 부(副)국방 인민 위원 전원과 모든 군관구 사령관, 16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에서 14명, 67명의 군단장 중에서 60명, 199명의 사단장 중에서 136명, 397명의 여단장 중에서 221명, 모든 연대장의 50% 이상을 포함한 '''전체 장성들의 90%, 영관급 지휘관의 80%'''를 골로 보내 버렸고 그 희생자는 35,000명에 달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보직해임으로 그쳤지만 1만 명 가량은 NKVD에 끌려가 수감, 고문, 심하면 처형되었다. 특히 전투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영관급 장교는 대부분 심해야 굴라크 수감으로 그쳤지만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참모장교 및 장성들은 총살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1941년이 되자 해임된 이들은 80% 가량 복직되었지만 조직관리 및 대부대 지휘통제 경험자가 거의 괴멸한 피해를 복구하기엔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특이한 것은 후일 소련군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게오르기 주코프]]는 예조프의 숙청 리스트에는 들지 않았지만 베리야가 실권을 잡은 뒤 숙청 리스트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할힌골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자 베리야는 슬그머니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웠다. 당연하지만 이 숙청의 칼날은 육해공 병종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육군 외에도 소련 공군과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공군의 경우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 장교와 지휘관들이 대거 수감, 사형을 당했고 [[설계국]]의 주요 기술자들은 사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수감당했다. 해군의 경우 [[러시아 제국|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포템킨 반란|파촘킨 반란]] 사건 등 [[러시아 혁명]] 과정에 깊이 관여해서 숙청을 피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마찬가지로 주요 장교단이 대거 숙청당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등 일부 고위 지휘관들이 숙청 대상자들의 신원 보증을 해주며 저항했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숙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소련 해군]]의 경우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이전부터 듣보잡 수준의 전력을 가져서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어 보이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해군이나 공군의 경우 설계/정비 기술자나 조종사 등 숙련된 인적 자원의 비중이 더욱 컸기 때문에 그 피해는 육군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대숙청으로 인해 붉은 군대의 지휘체계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소련군은 정규군인 붉은 군대만이 아니라 바로 저 숙청을 주도한 NKVD 산하 [[준군사조직]]마저 숙청의 후유증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연대(군대)|연대]]를 [[대위]]나 [[소령]][* [[영어]]로 Major라고 쓰니 [[소령]]으로 번역하는 게 맞지만 당시 소련군의 계급 분류에 따르면 [[대위]]부터가 영관급을 가리키는 선임장교에 속했고 Major는 [[대령]]의 바로 아래 계급에 해당했다. 소련군에 [[중령]] 계급이 분화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3년이다.]이 지휘하는 게 당연하다시피 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때문에 [[대령]] 사단장이 속출했으며 여단장[* 당시 소련 장성 계급은 지휘 가능한 부대 수준으로 표기되어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야전군 사령관(2급 군사령관, 대장급), 전선군 사령관(1급 군사령관, 원수급)으로 구분되었다.] 계급으로 군단을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것도 '''저 계급이 부족한 간부를 충당하기 위해 쾌속 진급시킨 계급'''이었다. 어떤 때는 1938년에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대위가 되어 사단 참모장교로 배치되고 보니 사단장부터 예하 연대장들까지 전부 숙청당한 상태라 대위가 사단 최선임자여서 월 단위로 진급을 거듭한 후 부임 2~3개월차에 대령으로 사단장이 된 경우도 흔했다. 더 불쌍한 건 사단장이 되고 나서 숙청의 칼날에 걸린 자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 참모였을 때 잡혀갔으면 수감으로 끝날 것을 사단장으로 잡혀가는 바람에 뒤통수에 바람구멍이 뚫린 사람도 꽤 많다고... 여담이지만 스탈린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는 군부 대숙청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출신 장교단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따라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스탈린처럼 군부의 고집불통 짬밥들을 모조리 숙청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처럼 군부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을 텐데..."[* Ich hätte gut daran getan, vor Jahren alles hören offiziere liquidieren zu lassen, Wie Joseph Stalin!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영화 몰락에서 나온다.]라고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히틀러의 망상과 달리 실제로는 독일 육군이 승승장구한 이유 중 그 군부 고위 장교들의 높은 숙련도 덕분이 굉장히 컸으니[* 몇몇 장군은 1차대전식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긴 했지만, 대부분 다른 나라들보단 훨씬 혁신적인 교리 연구 및 이해에 충실했고 유능했다.] 숙청을 따라했으면 더 빨리 패망했겠지만... 스탈린이 시시콜콜 간섭했던 독소전쟁 전반기와는 달리 후반기엔 간섭을 자제하여 소련군이 창의성 있게 잘 움직여 나간 건데 히틀러는 정반대로 해석했던 것.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정말로 그를 따라했다.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고 여겨진 장교들이 전선에서 소환되어 과장되거나 짜맞춘 결론으로 처형되었다. 그런 숙청재판을 주재한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는 우리의 비신스키[* 모스크바 재판의 수석검찰관.]다"라며 스탈린 식으로 숙청할 것을 주문했다. 결국 군부의 경우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연히 수많은 유능한 군인들이 좌천되거나 처형당하고 살아남은 장교들도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소련군의 급격한 약체화를 불러와 [[겨울전쟁]]과 [[독소전쟁]] 초기에 신나게 얻어터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거기다 이 숙청은 군인뿐 아니라 소련 각계각층의 인사와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파장이 대단히 컸다. 고위층 장교 한 명 잡아 없애기 시작하니 가족 관계며 친분 관계까지 사다리 타고 계속 내려오는 걸 거의 다 가지쳤을 정도. 부모가 잡혀가면 남은 아이들은 대체로 인민의 적의 자식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으로 이송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사실상 유형지나 다름없는 시베리아의 도시들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약받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니콜라이 예조프의 딸도 숙청당한 뒤 이 테크를 탔다. 그러나 흐루쇼프 시대에 숙청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을 때 이들에게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거주권을 발급해 주는 보상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투하쳅스키 원수의 경우 아내와 형제들까지 모두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딸은 고아원으로 갔다. 역사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대숙청 직전인 1934년 17차 전당대회 참석자 명단에 실린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또한 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 중 110명이 처형당하거나 자살 또는 의문사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당 간부용 아파트 단지에서 대숙청 종결 때까지 가장이 무사히 남아 있던 가구는 겨우 두 가구에 불과했다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있다. 반혁명 즉결 재판을 통해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겨우 2년 동안 1,345,000명에 달한다. 게다가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소련이 멸망한 뒤 공개된 비밀해제 문서들을 통해 각 마을과 시마다 인구비율당 '''체포 할당량'''을 주기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와 종전 후에도 별의 별 꼬투리를 다 잡혀서 끌려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희생자 숫자는 더 많아지는데 대전 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등과 함께 일당독재 국가가 [[국가 막장 테크|막장 테크]]를 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인 셈. 다만 흔히 알려진 2000만 명이 죽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4000만까지도 간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6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로 보고 있으며 90만에서 130만 명 사이로 보는 게 정설이다. 아무튼 이런 막장행위를 주선한 스탈린도 인재 부족에 대한 인식+예조프에 대한 견제의식+그외 잡다한 생각으로 인해 이 숙청을 완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1938년 '스탈린의 개새끼' 예조프를 자르고 NKVD 장관에 '스탈린의 [[하인리히 힘러|힘러]]' [[라브렌티 베리야]]를 임명했다. 예조프가 스탈린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사유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NKVD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예조프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행세했고 그때 참석한 스탈린은 이를 보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의심해 숙청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결국 1940년 스탈린은 예조프를 처형했다. 즉 '''숙청 담당자가 너무 숙청했다고 숙청당한 것'''으로 이 대숙청은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대숙청의 후폭풍은 별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숙청이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1939년 [[발트 3국]]이 소련에 합병되자 그곳에 있던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베리야에게 숙청되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을 대거 처형한 [[카틴 학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참고로 대숙청을 감독한 이가 베리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베리야는 실제로는 예조프가 남긴 후유증을 뒷수습했다. 물론 그렇다고 베리야가 착한 놈은 절대로 아니며 전쟁 기간 동안 베리야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은 예조프와 맞먹을 지경이다. 스탈린식 정치는 베리야조차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노선을 폐기하는 정책을 폈지만 결국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이렇게 예조프가 [[토사구팽]]당한 이유는 대숙청의 여파가 소련에서 얼마나 심각했던지 누구든 이 책임을 져야 했고 이는 곧 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돌아올 판이었다. 베리야는 취임 후 솔직히 공안기관의 오버를 인정하면서도 그걸 모두 예조프 탓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베리야는 막장으로 치달아 국가에 큰 해를 끼친 대숙청의 책임론에 대해 스탈린에 대해 실드를 쳐 준 건데 예조프를 임명한 것은 스탈린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 이 대숙청이 가져온 가장 큰 불행한 유산은 [[소련인]]들을 모두 명령과 규범에만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상부 지시 없이 훈련을 했다는 이유로 장교가 숙청되는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다들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데 혁신적인 아이디어, 자발적인 도전 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분야든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피드백이 계속돼야 하는데 모두 상관의 입만 쳐다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