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숙청 (문단 편집) == 양상 ==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br]1956년 2월 25일, 제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 대숙청은 말 그대로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공포 정치이자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학살극이었다.[*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일부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반혁명분자로 고발당하거나 공안기관의 의심을 사면 바로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끌고 와 [[고문]]하면 죄가 없어도 자기의 죄를 불고 약식재판[* 사실 이것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다.]을 거쳐 처형되거나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갔다. 대숙청 희생자 중 50% 이상이 이미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등으로 탄압당하던 부농과 지주 등 농민들이었지만 이들은 농촌에 숨거나 저항하기라도 했는데 도시에 거주하던 희생자들은 대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결백이 밝혀지리라 믿거나 자포자기해서 저항이나 도주 없이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러나 운 좋아도 사형만 면하고 굴라크행이었지 무죄로 인정받는 일은 없었다.[* 1934년의 제17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던 1827명의 대표들 중에서 1939년의 제18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생존자는 37명이었다.] 이렇게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총살해 1937년 여름부터 1938년 가을까지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70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2백만명 이상이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다. 공식적인 희생자는 총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95만에서 120만 명'''이 처형당하거나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거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고문이나 시베리아 유형 등으로 고통받은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때 나온 거니 대체로 축소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으나 흐루쇼프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당장 [[NKVD]]가 굴라크 등의 문제와 엮여 있었고 대숙청 기간의 소수민족 박해를 인정하면 소수민족 간의 분란이 있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걸러서 발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굴라크에 끌려간 사람은 수백만. 물론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예조프가 벌인 이런 마구잡이 숙청은 많은 인재를 유실시켜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예조프는 이 때문에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실각당하고 처형되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f0b6de689ffee4ace3da30dc4ac575305a2f37aad024f58f83b579402258c1ba.jpg|width=100%]]}}}|| || 대숙청 당시의 희생자들의 사진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Great_Purge_Resolution_of_Central_Committee.jpg|width=100%]]}}}|| || 스탈린, 몰로토프가 서명한 대숙청 당시 숙청 대상자 목록[br] [[데스노트|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살생부|사람은 숙청당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width=5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width=50%]]}}}|| ||<-2> [[니콜라이 예조프]] 숙청 전후 사진[br]왼쪽부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 [[원수(계급)|원수]][* 당시 국방장관이라고 할 만한 국방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 당시는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후에는 외무장관이라고 할 만한 외무인민위원.], 스탈린, --예조프--.[* 위 사진은 '인민의 에어브러시질'로 가장 유명한 사진이지만 [[https://www.intellectualtakeout.org/blog/stalin-erased-his-enemies-history-literally|4명이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스탈린 혼자 남은 사진이 된 사례]]보다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사진은 좌측부터 [[https://wblog.wiki/ko/Nikolay_Antipov|니콜라이 안티포프]], 스탈린, [[https://ko.wikipedia.org/wiki/세르게이_키로프|세르게이 키로프]], [[https://ko.wikipedia.org/wiki/니콜라이_슈베르니크|니콜라이 슈베르니크]]. 사실 이 중에서 대숙청으로 사망한 사람은 안티포프 하나뿐이긴 하지만.] || 심지어 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부터 두 명이나 숙청당했다. 초기 대숙청을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는 1937년에 체포돼 1938년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예조프]]도 1938년 11월 실각한 이후 1년 만에 체포돼 1940년 2월 처형당한 데다 [[기록말살형|각종 기록과 사진에서 지워졌다.]] 물론 장관들만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전임 요원들의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숙청자는 내일의 [[사형|시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피라미 요원들은 [[굴라크]]에 이송돼서 짧게 형을 살다가 굴라크 간수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썩어야 한다는 점에서 좌천 및 귀양이라고 봐도 되는 것. 물론 고위 인사는 얄짤없이 [[총살형]]이었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NKVD에서도 인력이 부족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을 데려다가 쓰곤 했다.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클리멘트 보로실로프|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대숙청|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로실로프가 무능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전선의 패착을 서로에게 떠밀며 탓하고 있지만 실상 겨울전쟁의 졸전의 책임은 두 사람이 다 지고 있다. 물론 보로실로프가 아무리 무능해도 [[러시아 내전]]에서는 유능했던 만큼 기본까지 못하는 장군은 아니었고 그저 시대적 변화를 못 읽은 것이 문제였는데 스탈린이 고위 장교를 다 날려버려 그나마 발휘할 수 있을 능력마저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자신도 억울할 만하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스탈린|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팩폭|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소 귀에 경 읽기|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 >Stalin(Hiroaki Kuromiya 저), 145~146쪽. [[겨울전쟁]] 때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온갖 추태를 보이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스탈린이 보로실로프를 불러내 야단치면서 벌어진 이야기[* 보로실로프는 이 사건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는데 스탈린의 절친이었기에 사건의 수위에도 불구하고 숙청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쓴 서적에도 인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지기는 했지만 원전을 전혀 찾을 수 없어서 진위를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일단 해당 서적(스탈린)에서는 [[흐루쇼프]]의 회고 인터뷰가 기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저 식사 자리에 흐루쇼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소련군]] 또한 숙청을 피할 수 없어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그 와중에 많은 능력 있는 장교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장교가 되어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이 추태를 보이는 데 기여했다. 게다가 대숙청 이전에도 소련군 장교단의 질이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이는 장교의 숫자를 부족하게 만들어 질적 저하를 더 심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는 소련군의 경직을 불러와 독소전 초반에 독일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스탈린의 트롤링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소련은 이때 독일에 비해 전쟁 준비가 거의 안됐기에(스탈린 본인부터가 1943년은 돼야 혹시 독일이 쳐들어와도 안전하게 막아내리라 봤다)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더라도 독일의 파상 공세를 온전히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소련 국외로 도피한 자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NKVD는 국외로 도피한 인물들도 집요하게 추적하여 요원을 파견해 암살 공작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레프 트로츠키]]가 이렇게 암살당했으며 예브헨 코노발레츠(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도자), 그 외 [[만주국]]으로 도피한 친일 러시아인들 등 [[러시아 내전]] 후 해외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상당수와 민족주의자들도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대숙청 이전의 일이긴 하나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였던 보리스 사빈코프 역시 NKVD에 의해 소련으로 유인, 체포되어 옥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