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소왕 (문단 편집) == 의문점들 ==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이 죽은 후 대무신왕 대에까지 살아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걸 보면 제법 건강하게 [[장수|오래 살았던 듯하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대무신왕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80대나 90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동명성왕이나 유리명왕 등이 모두 40대를 전후하여 승하하는 등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 시대로 따져도 전투를 직접 하기에는 엄청난 고령이었다.[* 고주몽보다 연상이라면 아무리 젊게 잡아도 사망 당시의 나이가 82세 이상이다.] 그런데 대소왕의 수명은 길다고 감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좀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있어서 걸러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일반적인 수명보다 많이 [[장수]]한 편인데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초기 몇몇 왕들에 대한 기록은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늘여진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황상 대소왕 역시 후대에 의해 조작 및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만큼 나이가 많았던 대소왕의 승하가 정말 갑작스럽게 벌어졌기에 동부여에 정치적 혼란이 생겼을 지가 의문점으로 제기된다. 현대에도 90살인 사람이라면 아직은 건강하더라도 언제든 노화나 심장마비 등 다양한 요소들로 갑작스레 죽을 수 있는 초고령인데 하물며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낮았던 고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평화로울 때조차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고 하물며 그 고령의 나이로 무려 친정을 감행했는데 죽음을 예상하지도 대비하지도 않은 것이 다소 이상할 따름. 고대에 90살이면 증손자는 물론이고 그 아래 후손까지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나이였으니, 대소왕도 본인을 대신할 태자나 손자를 이미 후계자로 지명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고, 설령 아들이 없었어도 후계자는 당연히 친척이든 누구든 정해놨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대소왕 나이를 생각해보면 장수왕이 그랬듯이 후계자를 정해놨는데 자기보다 먼저 늙어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고령의 군주가 전쟁터에 나가서 죽은 것이 예상 밖의 재난인 것으로 여기는 기록이 기이할 지경. 또한 나이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대소왕이 뜻밖에 전사하였다한들 그게 강성했던 부여가 차기 후계자 자리도 못 정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정도의 문제였는지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여 조정이 대소왕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부터 대소왕의 자식들이나 형제들 중 누군가를 다음 왕으로 내세우며 권력 다툼에 들어갈테니 내분으로 나라가 쪼개질지언정 다음 왕이 아예 없다는건 말이 안 된다. 내란 중 외침이라도 받아서 사이좋게 망한 것이면 몰라도,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니 갈사국이 쪼개어져 나왔다는 건 누군가는 부여의 도성에서 권력을 쥐어 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AD 49년에 후한 광무제에게 입조한 부여 왕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갈사국으로 이탈하지 않은 부여의 후계왕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부여와 동부여의 관계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 이 시기의 중국측 기록에 부여라고 표현되는 세력이 정말 동일집단인지는 아직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몇 가지 추측이 있었는데 '대소'라는 어휘가 특정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부여의 군주를 뜻하는 일반명사인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집트 군주를 '파라오', 페르시아의 군주를 '샤한샤'라고 칭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몽의 탈출 때 그 대소와 대무신왕과 싸운 대소왕이 다른 사람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다만 대소가 죽은 후에 부여에서 빠져나와 따로 갈사국을 세웠던 대소의 아우가 금와왕의 막내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대소왕이 금와왕의 아들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