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소왕 (문단 편집) === 고구려와의 대립 === 이후로 대소는 [[동명성왕]] 대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유리명왕]] 대의 기록에 부여의 군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즉위년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주몽의 아들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온 것이 기원전 19년 4월의 일임을 생각해 보면 대소왕의 즉위는 그보다 조금 이전의 일일 것이다. 집권 초기 대소는 고구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고구려를 침공하거나 인질 교환을 제안하는 등 허구한 날 괴롭혔다. 애초에 서기 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여와 고구려는 국력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편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인구가 8만 호에 달했으나, 신생 국가였던 고구려의 인구는 3만 호 정도로 그 절반에도 못미쳤다. 기원전 6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유리명왕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대함이 두려워서 태자 [[도절태자|도절]]을 인질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무섭다면서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인질 교환은 결렬되었다. 협상 결렬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 겨울에 5만 명의 병력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서기 9년에는 고구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너희 [[동명성왕|선왕]]이 우리 부여의 신하들을 꾀어서 달아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니 마땅히 부여를 섬겨야 한다."고 전하였는데, 즉 고구려를 속국으로 취급하려 한 것이다. 유리명왕은 이를 따를지 고심하였는데, 이때 유리명왕의 아들인 [[대무신왕|무휼]]이 나서면서 '''우리 선왕(주몽)이 당신들의 군주(대소) 때문에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서 고구려를 세웠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는 겁니까? 저희들에게 잘해주셔야 저희들도 당신을 섬길 것 아닙니까'''라고 답하는 바람에 또다시 [[굴욕]]을 당했다. 서기 20년에는 어느 부여인이 머리가 하나이며 몸은 두 개인 붉은 까마귀를 바치면서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이나 몸이 붉게 되었고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두 개이니 이는 곧 두 나라가 하나가 될 징조'라고 고하자 이 까마귀를 [[대무신왕]]에게 보냈는데, 이를 본 고구려에서는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까마귀가 남방의 색인 붉은색이 된 것은 천명이 남방으로 이동했다는 뜻이고, 이 상서로운 것을 얻어서 보존치 않고 남에게 주어버렸으니 앞날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까마귀를 보낸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