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성산성 (문단 편집) === 산성 === 산의 골짜기 두 개를 안에 넣고, 대성산의 봉우리 여섯 개를 연결해서 성벽을 쌓았으며,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 남문 쪽 골 안은 2중으로, 주작봉과 국사봉 사이 골 안에서는 3중으로 겹성을 쌓았다고. 성의 직선거리는 동서 2.3km, 남북 1.7km로 성문이 남문 포함해 20개가 있는데, 그중에는 전시에만 쓰던 샛길 문도 있다. 성벽은 사암과 화강석을 사각추 모양으로 다듬어서 서로 어긋나게 물리도록 해서 가지런하고 고르게 쌓았다. 성돌 크기는 기초 부분이 60×30 ㎝이고, 상부는 30×20 ㎝이며 성돌 안에서 글자가 약 1,000자 정도 남은 《[[법화경]]》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성은 동쪽과 서쪽으로는 경사가 급하고, 남쪽으로는 안학궁과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넓은 계곡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국사봉과 자모산이 있다. 성벽에는 방어용 시설인 치가 65개가 존재했고, 1958년 대성산성 발굴 당시 성 안에서 건물 터 20여 곳과 연못 '''170개'''가[* 《세종실록》에도 산성 꼭대기에 연못이 99개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하더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세종 당시에는 연못이 3개뿐이었고,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거나 순채(蓴菜)를 캤다고.] 확인되었다고 한다. 연못은 대부분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원형이나 삼각형 연못도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유원지로 개발하여 산책로도 조성해 놓았다. 주작봉 쪽엔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조성했다. 문서 참조. 남문을 1978년에 복원했다. 복원이라고 했지만 자기들 입맛에 맞춰 새로 지은거나 마찬가지다.[* 사실 한국의 삼국시대 건물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 시대 건축 양식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것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