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북 (문단 편집) == 광해군 외교 정책에 대한 대립 == 대북은 여진(=후금, 청)에 대해서는 서인보다 더 골수 강경파였는데, 광해군 때 후금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 못맺습니다!" 라고 했다.[* 사실 대북의 수장인 이이첨이 이것을 명분삼아 유자로서의 인망을 찾아 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는 해석도 있다.] 반면 서인의 경우 몇 명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귀나 최명길같은 '''인조반정 핵심 공신들'''.] 정묘호란 때 "부득이하면 칭신도[* 신하임을 칭하는것.] 가능합니다. 고려 때도 그랬잖아요." 라고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젊은 대간층은 둘 다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저버렸다며 탄핵했고 좀 나이와 지위가 있는 층이 사태를 잘 돌아보았다. --그리고 광해군은 대북을 제외한 당파를 모두 숙청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류가 "나가면 위태로울 확률이 반 보존될 확률이 반인데 계속 버티면 백이면 백 다 망할 겁니다."라며 사태를 제대로 짚었지만,[* 최명길도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면 만에 하나의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물론 이때도 명분에만 집착한 대간층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대북이라면 아마 "망하고 말고는 모르겠고 계속 버팁시다."라는 주장이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은 지독한 아가리 파이터 그 자체 대북 세력의 말대로 친명배금의 태도를 취한다면 첫번째로 세워야 할 방침은 만일 후금군이 '조선에 쳐들어올 때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것부터다. 광해군은 이를 인지하고는 [[병자호란|저들이 꼭 성을 함락시키며 내려올 리가 없으니]] 중도에서 막을 대책을 찾아보라고 비변사에 지시해도 "강화도나 남한산성에서 장기농성하면 각지에서 구원군이 올테니 문제없음" 이라는 식의 답변만 돌아왔고[* 이게 얼마나 오류였는지는 [[병자호란]] 참조 다만 병자호란은 청군의 경이로운 진격속도 때문에 뭘 해도 답이 없긴 했다. 남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경상이든 전라든 어디로든 도망치려고 했다간 순식간에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이것 정도라면 무능이라 할 순 있어도 뭔가 해본거 아니냐는 말을 할 순 있지만 진짜 문제는 광해군이 대금 정책과 관련해서 대책을 내놓는 자리를 마련하면 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인조 정권에서는 그래도 나름은 대책을 세워볼려고도 하고 무엇보다도 신하들도 이 일과 관련해서 손 놓고 있던건 아니었던 만큼 대북들은 서인보다도 더 비현실적에 무책임자들이었다. 서인들은 병자호란을 앞두고 결국 결론은 못 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논의라도 한 것과는 차이점이다. 하다하다못해 광해군 시기엔 후금에 도발걸자는 미친 주장을 하는 인간도 나왔다. 인조 시기엔 이런건 없었다. 대간들조차 오랑캐와 관계를 끊어야 마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단독으로 후금을 치자는 미친 소리는 안했다. 후에 송시열이 북벌론을 제기하고 효종도 이를 내세우지만 이는 그냥 구호일 뿐 진짜 그랬다기 보다는 흉내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서로 구상도 달랐다. 결국 광해군이 "기세등등한 이적을 잘 미봉하는게 국가를 위한 상책이다."[* 사르후 전투 이후 강홍립 처분을 놓고 일어난 논쟁에서 한 말],"저들이 쳐들어오면 그대들은 말로 물리칠 것인가? 붓으로 공격할 것인가? 저들이 [[병자호란|한강에서 말들을 물먹이는 일]]은 없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비변사에 던진 질문. 그러나 비변사는 앞에 나온 나라가 망할지언정 중국을 따르겠다는 대답을 한다.],"안으로는 힘쓰지 않고 밖으로만 큰소리친다. 무장들도 결전을 벌이자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건 가상히 생각하나 (실상은) 서쪽 변경을 죽는 곳이라고 여기는 양 두려워 하는가?" 등으로 질책하는 등 별 짓을 다했지만 이 집단은 끝까지 들어먹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