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무신왕 (문단 편집) === 왕자 시절 === 유리명왕의 장남 [[도절태자]]가 요절하고, 차남 [[해명태자]]는 자결하는 바람에 3남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 해명이 자결할 당시 대무신왕은 6세였다.] 《[[삼국사기]]》에 첫 등장한 것은 유리명왕 재위 28년 8월인데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대소에게 [[중국]] 고사 [[누란지위]]에서 따온 경고를 남겼다.[* 이 부분 때문에 후세의 성호 [[이익(실학자)|이익]]은 해명태자의 일과 연계하여 "해명태자가 황룡국에게 깝쳤다고 죽였다면서 왜 무휼은 안 죽였냐?"라고 유리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강국으로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 시절에는 부여에게 눌려 지내는 신세였고, 대무신왕 시절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전사시켰지만 고구려도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여와 고구려의 국력은 초기에는 부여가 강했는데 이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 서기 3세기 말에 벌어진 [[모용선비]]의 [[모용외]]에 의한 부여 침공 때라고 봐야 한다.]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에 부여가 쳐들어오자 무휼은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학반령 전투'''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근데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 앞에서 32년에 부여군을 대파했다는데 그럼 10세 때 뛰어난 [[전술]]로 적을 죽였다는 말이 된다. 다만 알 수 있듯이 11세는 아닌 것으로 보아 이때 대무신왕의 나이는 20~21세로 추정된다. 물론 진짜 10세 때 대무신왕이 [[소년병]]으로 참전하고, 왕자인 만큼 직접 전선에서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부하를 통해 부여군을 격파했다고 볼 수도 있기는 하다. 어머니는 고구려의 땅인 다물도의 영주이자 [[비류국]]의 전 왕인 [[송양]]의 딸이라고 기록에 나오지만 나이 문제와 얽혀 신뢰하지 않는 여론도 꽤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했는데 정작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리명왕 3년에 송양의 딸이 사망한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무휼이 태어났다면 태자일 때 나이는 이미 장성한 30세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37세이다. 또는 왕후 송씨가 사망했다는 기록 직후에 [[화희]]와 [[치희]]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망 기사는 왕후의 추가 책봉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해석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유리명왕이 송양의 다른 딸과 다시 결혼해 무휼을 낳았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 하지만 〈[[황조가]]〉에 있는 기록에는 송양의 딸이 아닌 다른 이가 왕후였으므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서 언급처럼 유리명왕의 손자라면 차라리 해석하기가 더 쉬운데 이 경우라면 장남 도절태자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거나 --송씨가 속한 비류부(후대의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후족이니--[* 아마도 작성자가 '''서부(연노부/소노부)'''와 '''북부(절노부/연나부)'''를 착각하여 적은 듯하다. 송양은 '''왕비족인 북부''' 출신이 아닌 본래 [[비류국]]의 왕으로 '''비류국'''은 후에 '''다물도'''로 불리고 다시 '''비류나부(沸流那部)'''로 불리다가 마침내 '''연노부(涓奴部)-소노부(消奴部)'''로 불리는데 [[고국천왕]] 시기에 5부체계를 5방위 체계로 바꾸며 '''서부(西部)'''로 불리게 된다. 왕비족으로 알려진 건 '''절노부(絶奴部)-제나부(提那部)'''로 불리다 5방위 체계가 되며 '''북부(北部)'''가 되는 '''연나부(椽那部)'''다] [[후계자]]였던 [[여율]]이 송양의 딸 또는 손녀와 결혼해서 대무신왕을 낳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대수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기록도 있는데 앞서 등장한 유리명왕 28년 8월 조에 따르면...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父王)'''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이 지난 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이와 같이 대무신왕이 [[추모]]를 '부왕'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무신왕은 유리명왕과 같은 대수의 인물이 되며 나이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부여 관련 기록에 대해 당시의 사실이 아니거나 후대에 첨부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많기 때문에 [[사료(역사)|사료]]는 참고만 해 두는 것이 좋다. 유리명왕 36년 태자로서 국정에 참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