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일치시기 (문단 편집) === 내지연장주의 ===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마침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조선에서 [[3.1 운동]]이 터지면서 조선에 대한 [[무단통치|헌병정치]]와 대만에 대한 특별통치주의는 일본 민간 정치인들의 큰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18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일본 제국)|대만군]](대만 주둔 일본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되고, 동시에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어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사실 조선도 [[문화통치]]기 당시엔 문관 총독이 임명될 수 있게 해놨지만, 실제론 문관 총독이 단 1명도 임명되지 못했다.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를 들어 군부가 계속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 및 체급은 조선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대만의 총독은 조선의 총독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타이완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内台融合)--[[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하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실력양성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