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정치 (문단 편집) === 대륙 중화민국 시절 === 처음부터 중화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대륙을 통치하던 시기엔 대내외적인 불안정에 시달려 민주주의는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었다. 북양정부 초기에는 '''[[위안스카이]]의 [[홍헌제제|황제 욕심]],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돤치루이]], [[우페이푸]], [[장쭤린]] 등 [[군벌/중화민국|군벌]]들의 깽판'''으로 민주주의 따위는 바랄 수 없었다. 1928년에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북]][[국민당의 2차 북벌|벌]]을 완료해 중국은 통일되고 [[난징]]에서 [[중화민국/국민정부|국민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통일은 명목에 불과하여 군벌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서 따로 놀았고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민주주의 이전에 강력한 국가정당, 즉 [[중국 국민당]]이 우선 국가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헌법도 만들지 않고 일당독재를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대만 헌법|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나름대로의 ~~일당우위적~~ 민주주의 형태를 갖춰보려는 시도는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군정 → 훈정 → 헌정 논리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여기서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이 소집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킨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제헌 국민대회에서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3당 훈정에 바탕한 중화민국 헌정의 성립을 선언했다.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중화민국은 대륙 각지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주하고 있었다. 이 때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을 우선 토벌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대회]]에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입법했지만, [[대만군|중화민국 국군]]이 연전연패하면서 [[화북]] 전부를 내주고, [[인민해방군]]은 [[장강]]을 넘어 난징까지 들이닥쳤다. [[광저우]], [[충칭]], [[청두]] 등으로 계속해서 도망가던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은 생존을 위해 끝내 대륙을 떠나 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옮기는 [[국부천대]]를 해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