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경제 (문단 편집) == 국민경제 == 세계 2차대전 직후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일본, 영국령 홍콩에 이어 3번째로 1인당 GDP가 높았던 국가였다. 다만 실제론 이건 통계적인 수치 뿐이었고, 1940년대 대만은 매년 [[인플레이션|급속한 물가상승]]에 시달렸고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참패하고 국민당 패잔병들과 중국 본토의 주민이 대거 대만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주택부족에 시달리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산업시설은 대체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었고 국공내전에서 패전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국부천대]]를 하는 김에 중국 본토에서 긁어모은 금은보화들을 엄청나게 가져오고, 부유층들도 공산당을 피해서 같이 이주했기에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될 만한 자본금이나 물적 인프라는 한국에 비해서 잘 남아있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에서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경험을 상기하면서 대만에서 토지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고, 물가통제를 위해 고금리 정책을 실행했는데, 일반적으로 고금리정책은 대출을 어렵게 만들어서 기업들의 투자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지만, 대만에서는 물가가 안정되고 저축률도 크게 불어나면서 [[국부천대]]의 충격을 조기에 진화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게 된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으로 겁을 먹은 미국이 대만에게 막대한 경제원조를 단행함에 따라, 막대한 원조자금을 타낼 수 있었고, 1953년부터 경제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면서 대만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농업 부문의 육성도 성공해 일찍부터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55년 유엔 아시아극동위원회[*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ECAFE) ]가 발간한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은 1948~1954년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로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필리핀에 이어 2위였다. 다만 달러 기준 소득수준의 상승이 생각보다 더뎠는데 이는 두 차례씩이나 화폐 가치를 절하했기 때문이었다.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처음에 환율을 5위안당 1달러로 지정했지만 2차례 절하를 거치면서 35위안당 1달러로 화폐가치가 떨어졌던 것. 이 때문에 실질성장률은 8%대에 달하는 수준이었음에도 생각보다 포텐이 터지지는 않았다.[* 1951년 기준으로 151달러였던 것이 1960년에는 154달러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들어 미국이 원조금액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대만은 수출에 유리하게끔 환율제도를 개편하면서까지 수출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고, 수출 장려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면서 1960년대에도 대만은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이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2차례 씩이나 경제성과를 말아먹으면서 중국과 소득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중국이 상임이사국이 되고, 대만이 UN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물론이고 UN에서 사실상 강제로 축출당하면서 대만의 국제적인 위상이 크게 저하되고,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물가가 크게 상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대만은 이를 중간재 부품산업의 육성으로 돌파했고, 오일쇼크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화학공업 육성에도 성과를 올리면서 1976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1천 달러를 넘어서고 1980년에 2천 달러에 도달했으며 1982년 칠레를 1인당 GDP에서 추월하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며[* 칠레의 경우에는 1982년 외채위기의 여파로 1985년까지 1인당 GDP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 불황기를 보였고 피노체트 정권이 끝났을 때인 1989년 기준으로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1인당 GDP 수준을 보였다.], 전후 역사상 상대적 정점이던 1989년도에는 그리스를 최초로 돌파하였고, 1992년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게 된다. IMF의 기준으로 볼 때 대만이 선진국으로 분류된 것은 1983년이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건이다. 사실 대한민국도 제대로 선진국으로 인식된 시기는 2010년대 이후이지만, 대만과 동일하게 IMF 기준으로는 1987년에 이미 선진국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1987년의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듯 실제 대만이 1983년에 완전한 선진국으로 인식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참고로 1983년 기준으로 1인당 GDP는 2,882달러였으며 이는 동시기 한국의 1.3배 정도였다.] [[개발도상국]](Emerging Country)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Advanced Country)으로 넘어간 최초의 사례이다.[* 일본이나 홍콩은 1970년대부터 선진국이었다. [[싱가포르]]도 1980년대에 선진국으로 넘어갔으며, [[한국]]의 경우 명목상의 선진국으로 분류된 것은 1980년대이며. 가장 최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는 2016년 선진국으로 분류된 유럽의 [[리투아니아]].] 그 뒤 1993년 ~ 2002년까지 그리스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상태를 유지하였다[* 참고로 이후 그리스의 1인당 GDP가 유로화로 뻥튀기되며 뒤쳐졌다가 [[그리스 경제위기]]가 터지고 난 후인 2014년 다시 대만이 그리스의 1인당 GDP를 추월했다.]. 이 경제성장의 결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모범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이자 따라잡아야 할 국가로 언급되는 나라로서 이미 1970년대에 컬러TV가 일상적으로 보급되었고 자가용 보급도 한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다. 참고로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의 대만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나면 '''중국 대륙 전체의 40%에 해당되었을 수준이었다'''.[* 중국 기준에서 일개 대도시인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1/4에 달했을 시절도 있었다.(1993년) 외환위기 직전 전성기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는 '''중국의 90%'''에 달했다.] 1980년대 오일쇼크가 잠잠해진 이후로는 매년 안정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한국은 1985년 이전에는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으며 1986년부터 1989년까지 [[3저 호황]]으로 경상수지 흑자액이 일시적으로 100억 달러대까지 도달한 적이 있었지만 3저 호황의 여파가 간 이후부터는 다시금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해서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경상수지가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렇게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면서 대만에 비해 경제운용에 있어서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IMF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외환보유고가 너무 많다보니 1990년대 초반에는 오히려 국가적인 단위에서 외화유출을 시도해보기까지 했으며 이렇게 쌓아올린 외환보유고로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도 거뜬히 피했다. 그러나 IT버블 붕괴의 여파로 2001년에 처음 역성장을 하게 되었고 이후로 성장세는 회복되었지만 계속되는 화폐가치 하락으로 말미암아 결국 2003년 미국 달러 기준 1인당 GDP가 한국에게 추월당했다. 2003년 한국과 대만의 1인당 명목 GDP는 각각 $14,210, $14,080. 출처 IMF.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만은 연 5.7%대의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도중에 반도체 기업들이 상당수 무너지면서 홍역을 앓았던 적이 있고 또한 대만 기업들의 대규모 중국 진출까지 겹치며 임금상승률은 침체되었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최저임금이 무려 10년 씩이나 동결되었는데 이로 인해 대만의 내수경제는 침체된 상태이다. 또한 임금 억제 정책이 201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다보니 중국에게 인재를 빼앗기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등 엄청난 후유증을 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