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공황 (문단 편집) === [[바이마르 공화국|독일국]] === [[독일 제국]]은 1차 대전이 끝난 후 [[협상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했으며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돈을 마구 찍어내다 보니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의 수렁에서 1920년대 중후반에 간신히 빠져나온 뒤 회복하던 경제가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보다 일시적으로는 실업률도 훨씬 높아지고 사회가 입은 타격도 더 컸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졌고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젖은 독일인들이 차츰 극단주의적으로 변하며 타국에 대한 증오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었다.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이득을 무척 보았는데 대공황 이전 나치는 [[뮌헨 폭동]] 실패로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독일인들의 눈은 공산당과 나치당으로 몰렸고 1928년에 12석이었던 나치당은 1930년 104석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1932년까지 나치당은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지 못했고 히틀러의 승승장구는 정치적으로 이용해 보려는 [[프란츠 폰 파펜]]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바이마르 공화국 우파들과 복고주의자들이 정권을 위해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자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부총리로 임명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나치당의 지지율은 30~40%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공산당과 사민당을 무력화시키고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활용해 [[수권법]]을 통과시켰고 나치당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공산당과 사민당을 없애 버렸다. 이후 당내 과격 좌파 세력이었던 [[에른스트 룀]]과 [[SA|돌격대]] 그리고 나치당을 계속해서 자신들의 통제권에 넣으려고 하며 사사건건 자신에 반대하던 중앙당 복고주의자들을 [[장검의 밤]]을 통해 제거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안정화시킨 후 [[얄마르 샤흐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했고 샤흐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입안했다. 그 결과 실업자들은 알바라도 얻어 먹고 살 수 있게 됨에 따라 길거리에 넘쳐났던 노숙자들은 사라졌고 중산층도 회복되자 자산가치 하락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면서 경제규모도 회복되었다. 집권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에 대한 뚜렷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국민들은[* 1932년 11월 총선까지 나치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득표율은 30% 중후반에 고착되어 있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직후 치루어진 1933년 3월 총선에서야 나치당의 지지율은 43%를 기록할 수 있었다. ] 점차 히틀러가 국가 기강을 다져나가고 국가계획적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를 되살리자 히틀러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이후 벌어질 참극은 예고되어 있었다. 나치 자체가 원래 호전적이었지만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많다. 당장 [[아우토반]] 구축 등 막대한 정부 지출 대부분이 빚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뭐라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다만 아우토반의 경우 나름 건설 경기 부흥으로 경제에 기여하겠지 생각하고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독일인들이 건설 노동자 취업을 꺼린 탓에 의외로 고용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이미 독일 경제가 궤도에 올라 3D 업종 기피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결국 서독에서 튀르키예(터키)인 노동자들을 대거 데려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또 이 와중에 재무장을 명목으로 군비지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0년대 후반 들어서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유 중 하나가 히틀러가 재정위기를 전쟁을 통한 약탈과 채권국들의 붕괴, 점령지들의 식민화 등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을 하자마자 '''1순위로 한 것이 금고를 털어서 금을 빼앗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합병한 후에도 한 것이 제일 먼저 국립은행에서 금을 빼았은 것이었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항상 금부터 뺏었다.] [[얄마르 샤흐트]]는 재정난을 군비를 적정 수준에서 유지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1936년부턴 이미 히틀러와 독일 경제를 본격적으로 군사화하던 4개년 계획의 책임자인 괴링 등과 갈등을 벌였으며 결국 중앙은행 총재직에서 1939년에 잘리고 1943년 장관직에서도 해임당한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히틀러가 국가 내의 반대파들에 무자비한 보복을 할 당시 샤흐트는 체포된 후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등을 전전하다 미군이 강제수용소를 점령하며 풀려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