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공황 (문단 편집) === [[미국]] ===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와 [[허버트 후버]] 정부에 걸쳐 11년간 재무장관직을 지냈던 앤드루 맬런은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을때 “주식을 청산하고, 기업을 청산하고, 노동자를 청산하고, 농민을 청산하라”는 식으로 기업이나 서민들을 구제하기보다는 구조조정과 균형재정을 우선시하고 투자의 책임은 엄연히 개인에게 있으므로 국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일단 경제 거품을 빼고 빚투와 영끌 열풍을 막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후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농작물은 썩고 있는데 서민들은 땡전 한 푼 없어서 음식을 사지 못하는 결과만을 초래했고 그 상황이 몇 년씩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맬런은 기업인으로써는 유능했고 192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많이 오른 세금을 내리는 감세 정책 등을 시행하여 유능한 관료라는 평도 듣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거품경제]]로 이어졌다는 것이 문제였고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앤드류 맬런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빛이 바래게 된다. [[허버트 후버]]는 뒤늦게 앤드루 맬런을 해임시키며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이미 수습하기에 때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후버는 말년에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의 정적들은 내가 혼자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환상적 지성과 경제적 위력을 지녔다고 칭송했다.'고 [[자학]]하기도 했다. 사실 대공황은 후버보다도 전임자였던 쿨리지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후버 역시 공황이 터졌음에도 뒷수습을 못한 책임은 있지만. 이처럼 미국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입혀서 대공황 이후 약 20여 년간 미국 정계는 민주당이 독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미국 내에서도 대공황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지역은 있었다. 바로 [[플로리다]]다. 왜 이 지역이 왜 대공황에서 자유로웠냐면 1925년과 1926년에 걸쳐 부동산 값이 폭락하고 허리케인이 닥치면서 붕괴되어 빚투로 과대평가된 자산을 샀던 사람들이 다 망하고 정상적인 가격에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거품이 다 빠져서 대공황에도 자산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역설적으로 보면 남들 다 겪는 대공황을 '''1926년부터''' 3년이나 일찍 시작했으므로 좋은 게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이후 1932년 대선에서 당시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고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뉴딜 정책은 루스벨트의 집권 1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 그의 재선에도 도움을 준다. 다만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재선도 여유 있게 쟁취했지만 집권 2기 초반에 맞닥뜨린 불황으로 인해 아쉬운 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학자 간에도 의견이 갈리는데 일단 상대적으로 불황이 왔다는 거지 절대치로 보면 대공황에 비할 수준은 아니라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고, 1938년 불황은 연방정부가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당시에도 반대가 심하던 의회 내 재정긴축론자들과 타협하면서 재정 지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폴 크루그먼]]의 견해도 있다. 이 논리대로면 이때의 불황은 뉴딜이 불황을 끝내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뉴딜의 후퇴가 오히려 새로운 불황을 가져왔다는 것인 셈.[* 크루그먼은 진정한 코미디는 [[2010년대|80여년 뒤]] 일부 멍청한 후손들이 이걸 집어들고 재정정책이 대공황에 별 효력이 없었다고 난리를 낸다는 점이라고 자칭 신자유주의자들을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뉴딜과 루즈벨트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침체기였으나 '''이를 완벽히 해결해 준 게 제2차 세계 대전이다'''. 침략 전쟁을 당하자 분노한 전국민이 정부의 정책에 찬성했으며[* 좌파, 우파 모두 서로 싸우기 바랐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니 눈 앞의 적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정책과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며 국가 계획이 막힘없이 바로바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성인 남성과 여성은 군대와 군수공장으로 가 '''실업률 1%를 달성했다.'''[* 사실상 장애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층이 노동을 한다는 이야기다.] 또 전쟁 때문에 무기를 만들 여력이 없는 유럽 국가들은[* 특히 영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의 공격 때문에 군수공장 만들기도 벅차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도 못 만들었다.] 미국 무기를 돈 되는 대로 사들였고 이는 미국이 금과 달러가 넘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전후 질서[* 특히 동맹국이지만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을 적당히 견제하여 2인자로 만들었다.]를 바로잡아 [[초강대국]]이 되어 전세계가 미국의 달러와 금만 사용하게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위대한 50년대'''와 지금의 미국이 이뤄졌다. 대공황 이후 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 사상을 적용한 케인스주의가 뉴딜에 적용되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와 직접적 연관은 적은 편이었다. 각자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 다만 정책적으로는 연동되는 측면은 있었다.]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케인스를 직접 만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겠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허나 FDR은 균형재정으론 대공황을 돌파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후 균형재정 목표를 후퇴하면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균형재정을 완전히 버렸다는 건 아니고 '정기'와 '비상' 예산을 나누어 비상시엔 한시적으로 수입보다 지출을 늘려 균형재정을 후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때 케인즈가 몇 차례 자문을 해 주기도 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