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랑권 (문단 편집) ==== 개조(開祖) 전설을 바로 잡고 당랑권을 널리 퍼뜨리다 : 황한훈(黃漢勛) ==== 홍콩 정무체육회 나광옥의 문하생 중 황한훈(黃漢勛)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황한훈은 불과 18세 나이에 마카오에 당랑 국술관을 개설한 실력자였다고 한다. 나광옥에게도 두텁게 신뢰받아, 935년, 19세 나이로 한구 정무회의 교련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을 피해 다시 홍콩에 돌아왔는데, 이때쯤에는 황한훈도 표준어인 북경어를 배워 스승 나광옥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홍콩에서는 주로 광동어를 사용한다. 홍콩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황한훈은 스승인 나광옥에게 질문했다 한다. || '''황한훈''' : 스승님, 우리 개조(開祖)는 왕랑(王朗)이죠? '''나광옥''' :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해주지 않았나. 성은 왕(王), 이름은 몰라. '''황한훈''' : 네???!! || 그제야 황한훈은, 당시 나광옥의 구술(口述)을 오보상이 받아 적을 때, 나광옥이 ‘성이 왕(王)인 남자’라는 의미로 ‘젊은이, 사나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랑(郞)’을 붙여, ‘왕랑(王郞)’이라고 말했으나, 오보상이 발음이 똑같은 ‘왕랑(王朗)’으로 잘못 적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한훈은 1946년 당랑권술천비(螳螂拳術闡秘)를 내며, 다시 당랑권술사(螳螂拳術史)를 정리할 때, 개조(開祖)를 왕랑(王郞)으로 고쳐 썼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왕랑(王郞)이라는 말을, 왕랑(王朗)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황한훈은 홍콩을 거점으로 하여, 당랑권 관련 서적을 30권 넘게 저술하여, 당랑권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때 당랑권 수련자들 중 황한훈의 서적을 참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도 한다. 당랑권은 1900년대 초까지는 발상지인 산동성 외 다른 곳에서는 전승되지 않았으나, 정무체조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정무체조학교는 후에 중앙정무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어, 홍콩, 광주, 하문 등의 중국 남부 각지에까지 지부를 설립해, 당랑권을 동남아시아 주변에 전파하였다. 그러다 1948년, 중국에 정변이 일어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 많은 당랑권사들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대만에서 당랑권이 널리 퍼졌는데, 칠성, 매화파의 이곤산(李崑山), 왕송정(王松亭), 비문파의 장덕규(張德奎), 육합파의 장상삼(張詳三), 유운초(劉雲樵), 소욱창(蘇昱彰), 대사철(戴士哲), 주고산(周高山) 등이 당랑권을 퍼뜨렸다. 그리고 산동성이나 대만을 중심으로 한 중국 남부에서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같은 동남아시아에까지 널리 퍼졌다. 그 실용성을 인정받은 당랑권은, 화교(華僑)의 진출과 함께 한국, 미국, 일본을 시작으로 하여 세계 각국에 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